1374년(공민왕 23) 상호군(上戶軍)으로 밀직부사 정비(鄭庇)와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78년(우왕 4)에는 예의판서(禮儀判書)로 공민왕의 시호와 우왕의 승습(承襲)을 청하러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0년에는 일찍이(1374년, 우왕 즉위)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을 살해한 사건을 해명하기 위하여 숭경윤(崇敬尹)으로서 계품사(啓稟使)가 되어 요동에 가서 이를 해명하였으나 체포되어 연경(燕京)에 압송, 천계사(天界寺)에 갇혔다가 이 해에 풀려나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