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교서의 크기는 세로 39.5㎝, 가로 263.1㎝, 초상화의 크기는 세로 169㎝, 가로 94㎝. 이중로의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진지(鎭之), 호는 송계거사(松溪居士)이다. 개국공신 이지란(李之蘭)의 후손이며, 16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으로 능력을 발휘하며 성장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때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 등과 함께 군사를 모아 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녹훈되고 청흥군(靑興君)에 봉해졌다. 1624년 2월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던 중 평산의 마탄(馬灘)에서 반군의 기습으로 관군이 포위되자 자결하였다. 정사공신교서와 공신도상은 이중로의 사후(死後)인 1625년에 내려졌다.
이중로의 공신교서(功臣敎書)에는 그에게 두 자급(資級)을 올려주고 화상(畵像)을 그려 후세에 전하게 하며, 부모와 처, 아들에게도 두 자급을 올려주며 큰 아들의 경우 이중로가 누리던 지위를 영원히 세습할 수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두루마리 형태인 교서는 저지(楮紙) 바탕에 생견(生絹)으로 배접되어 있다. 교서의 전후 상하 일부에 남색으로 채색된 천을 입혔고, 교서 한쪽 끝에는 목제축이 달려 있어 보관하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네 변에는 주선(朱線)이 일정하게 그어져 있고 그 안에 상하로 2.5㎝ 간격으로 주선이 있고 주선 안에 내용이 묵서로 기재되어 있다.
교서에는 총 50명의 공신이 책훈되어 있는데, 1등공신은 김류(金瑬)·이귀(李貴) 등 9인, 2등공신은 이괄(李适)·김경징(金慶徵) 등 14인, 3등공신은 박유명(朴惟明)·한교(韓嶠) 등 27인이다. 그러나 이들 공신 중 1등에 책훈된 김자점(金自點)·심기원(沈器遠)은 뒤에 공신 명부에서 빠지게 되었다. 이 교서는 이들이 공신 명단에서 빠지기 전에 발급되었기 때문에 이들 이름자에 묵서로 원(圓)을 그려 도려낸 표시를 하였다.
이중로의 정사공신 초상은 사모에 단령(團領)을 입고 두 손을 소매 안에서 맞잡고 앉은 모습이다. 무관 흉배인 해치(獬豸) 흉배를 달았고, 얼굴은 약간 반측면으로 그렸다. 선묘(線描)로 이목구비의 특징을 포착하여 묘사하였으며, 단조로운 선염(渲染)으로 채색하였지만, 콧등과 이마, 양 관골 등에는 홍색조를 부분적으로 더하여 생기를 주었다. 의자 뒤로 단령이 접히면서 드러난 세모꼴의 무와 바닥에 그려 넣은 채전(彩氈) 등 전형적인 공신 초상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중로의 정사공신교서는 정사공신에 대한 대우와 포상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중로의 공신 초상은 17세기 공신도상의 전형을 보여주며, 17세기 초상화가 지닌 화법상의 한계와 더불어 당시 초상화의 시대 양식을 보존한 기년작(紀年作)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임진왜란 때에는 공신 책록 당시에 사망한 공신 초상화는 흠전(欠典)이라 하여 그리지 않았으나 정사공신의 경우는 사망한 공신의 초상화도 그렸음을 알려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