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정제용의 자는 형로(亨櫓) 호는 계재(溪齋)이며,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후산(后山) 허유(許愈)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정제용은 43세에 생을 마쳤는데, 이 초상화는 40세 무렵인 1905년경에 초상화가 채용신(蔡龍臣)이 그린 것이다. 정제용의 초상화는 채용신이 구사한 전통 초상화법과 사진술의 성공적인 절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머리에 관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은 채 가부좌(跏趺坐)로 앉아 정면을 향한 모습이다. 오른손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고, 왼손에는 깃털부채를 들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은 꼿꼿한 선비의 기상을 느끼게 한다. 채용신은 조선 후기 초상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19세기 말에 유입된 사진술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초상화 양식을 개척한 화가이다.
정제용 초상의 얼굴색은 가라앉은 황갈색의 색조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콧등과 이마에는 서양화법에서 응용한 광선 효과를 주어 정면상이면서도 입체감을 강조하였다. 얼굴 묘사에는 미세한 붓질을 무수히 반복하여 밀도 높은 질감을 살림으로써 이전 시기의 초상화와 다른 극사실의 세계를 보여준다. 옷 주름을 선으로 묘사하던 이전 방식과 달리 옷의 주름과 굴곡진 부분에 음영법(陰影法)을 적용하여 깊은 입체감을 주었다. 바닥에 깔린 돗자리는 채용신의 다른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돗자리의 결이 사선방향이 아닌 수직방향으로 그린 것이 특징이다.
채용신은 57세인 1906년에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아들, 손자와 함께 ‘채석강도화소(蔡石江圖畵所)’라는 공방(工房)을 차린 뒤 주문을 받아 초상화를 제작하는 전문화가로 활동하였다. 이후 채용신의 초상화는 대상 인물의 실상에 대한 탐색보다 외면적 형태에 치우치게 되는데, 정제용 초상은 그 이전에 그린 것이다.
정제용 초상은 채용신의 초상화가 완숙미를 더하던 60세 무렵의 초상 양식과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채용신이 전통화법과 서양화법을 어떻게 조화시켜 초상화의 완성도를 높였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