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첩(孔懷帖)은 18세기의 회화 애호가이자 문필가였던 옥소(玉所)권섭이 소장한 화첩이다. 모두 8면으로 꾸며진 이 화첩에는 권섭의 동생 권영(權瑩 1678∼1745)이 권섭에게 보낸 편지와 정선(鄭歚, 1676∼1759)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2점, 그리고 권섭(權燮, 1671∼1759)이 쓴 발문이 장황(粧潢)되어 있다. 편지는 동생 권영이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권섭에게 쓴 것이다. 병세가 위독한 가운데 평소 정선의 그림을 좋아한 형에게 정선의 그림 2점을 선물로 보냈다. 동생이 보낸 편지와 이후 그림을 전해 받은 권섭은 여기에 자신의 발문을 붙여 첩으로 꾸몄다. 그리고 화첩의 제목을 ‘공회첩’이라 했다. ‘공회(孔懷)’는 ‘대단히 사모한다’거나 ‘형제간에 우애가 좋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권섭과 권영 형제의 사연이 깃든 화첩이다. 현재 개인소장으로 전한다.
이 화첩을 꾸민 권섭은 그림 감상과 제화시(題畵詩) 창작에 취미가 깊었던 인물이다. 권섭의 본관은 안동으로, 노론계 명문가 출신이지만 일찍이 관직을 단념하고 탐승과 문필 활동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림을 직접 그리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부터 알고 지낸 정선의 그림에 큰 매력을 느껴 진경산수화를 비롯한 사실주의 그림을 선호하였다.
권섭의 동생인 권영은 자가 중온(仲蘊), 호는 청은(淸隱)이다. 1721년(경종 11) 44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여 좌랑을 지냈으며, 1732년(영조 8) 55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740년(영조 16)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이후 1745년(영조 21) 2월 8일에 68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화첩의 앞부분에 실린 편지는 권영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권섭에게 보낸 것이다. 초서로 써내려 간 내용은 권영 자신의 건강과 근황을 적은 것이다. 자신의 건강을 노심초사 걱정하는 형에게 최근의 병세와 처방의 경과를 담담히 전하는 내용이다. 권영은 이 편지를 쓰고 난 보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권영이 이 편지를 쓴 날짜는 1월 22일이고, 그 뒤 28일에는 정선의 그림을 권섭에게 보냈다.
화첩 속의 두 그림은 「옹천(甕遷)」과 「반구(盤龜)」이다. 옹천은 강원도 고성에서 통천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절벽이다. 독[甕]과 같은 모양의 가파른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옹천이라 불렀다. 또한 반구는 암각화(巖刻畵)로 유명한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에 있다. 고려말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언양에 유배되었을 때 머물렀던 곳으로 경관이 빼어난 곳이기도 하다. 반구라는 명칭은 이곳에 있는 절벽의 산등성이가 마치 거북이가 앉아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두 점의 그림 가운데 「옹천」은 기존에 그린 예가 몇 점 있지만, 「반구」는 정선의 진경산수화로는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권영이 이 그림을 소장한 시점을 졸년인 1745년(영조 21) 이전으로 본다면, 정선이 70세 이전에 그린 것이 된다. 정선의 그림 「반구」와 「옹천」에는 정선의 노년기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완숙한 필치가 잘 나타나 있다. 권영이 정선의 그림을 구하게 된 과정은 알 수 없지만, 안동김씨 일문들의 후원을 받던 정선과의 친분이 남달랐음을 짐작하게 한다.
권섭은 동생의 편지를 정선의 그림과 함께 묶어 동생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이 화첩에 담고자 했다. 그림 애호가인 권섭과 관료를 지낸 권영을 통해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전해진 한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반구」는 정선의 그림으로는 처음 소개된 것이며, 정선이 울산과 그 일대를 기행하면서 남긴 그림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이 화첩에 수록된 편지와 발문은 정선의 그림을 무척 애호했던 권섭과 권영, 두 형제의 고상한 취미와 깊은 형제애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사연을 화첩으로 꾸민 감상물의 형식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