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행단현가도(孔子杏壇絃歌圖)」는 공자의 생전 일화 가운데 ‘행단예악(杏亶禮樂)’의 내용을 담은 그림으로, 1887년(고종 24) 지방 화사(畵師) 나능호(羅能浩)가 베껴 그린 이모본이다. 노나라로 돌아온 공자는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자, 벼슬과 출세욕을 버리고 매일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과 거문고를 타며, 『서경(書經)』, 『예기(禮記)』 등을 찬술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행단예악’이라는 일화로 널리 그려졌고, 공자와 관련된 고사화(故事畵)로도 그려졌다.
「공자행단현가도」에서 공자는 삽병(揷屛)을 배경으로 앉아 있고, 그 좌우에 두 사람이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다. 주변에는 분홍색 꽃이 만개한 살구나무가 촘촘하게 들어서 있고, 그 사이로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이 그림은 1887년의 이모본이지만, 그 원본은 1645년(인조 23) 동지사로 중국에 다녀온 함헌(咸軒, 1508~?)이 가져온 그림으로 전한다. 화면의 상단에는 1887년(고종 24)에 제작 배경과 경위를 쓴 글이 있고, 그 아래에는 서예가 인전(仁田) 신덕선(申德善)이 1990년 입하(立夏)에 쓴 추기가 적혀 있다. 이 그림은 1887년에 이모본으로 그려진 뒤, 완산 지방에서 대대로 전해온 것으로 파악된다. 2012년 9월 13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공자행단현가도」은 1887년(고종 24) 당시, 완산(完山) 향교에 봉안되어 있던 중국 화가가 그린 ‘행단도’를 지방 화사 나능호가 이모한 뒤 완산 지역에 세전해 오고 있는 그림이다. 특히 고령 신씨(高嶺申氏) 집안에서 주로 소장해 왔으며, 1990년에 경기도 화성군의 향남면 구문천리 별묘에 소장되었다.
이 그림은 족자로 장황되었고, 그림의 사면에 남색 비단을 대었다. 족자의 상하단에 엷은 남색 비단을 붙여 만든 것은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장황 방식이다. 화면에 가로로 꺾인 흔적이 많지만, 색감이나 그림의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편이다.
이 그림은 중국 원대 왕진붕본인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를 비롯하여 명대 하정서본이 도상(圖像)의 근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정서본에 실린 38장면의 장면 중에 「행단예악」이 실려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동원기증품 『성적도』55폭에도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화풍으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는 점이 특징이다.
그림 위쪽에 적힌 발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1645년(인조 23)에 함헌이 동지사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을 때 공자가 태어나서 자란 중국 산동성 곡부현(曲阜縣)의 궐리(闕里)에 들렀다. 여기에서 그는 공자의 후손 공대춘(孔大春)에게서 오도자(吳道子)가 그렸다는 공자의 영정 한 폭과 함께 ‘행단도’를 선사받았다.
강릉 출신인 함헌은 만년에 이르러 강릉에 오봉서원(五峯書院)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이때 중국에서 가져온 ‘행단도’를 서원에 봉안하였다. 1675년(숙종 1)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귀향을 간 송시열이 ‘행단도’를 보고 자신이 있는 함경도로 가져오라고 명하였다고 하는데, 이때 잠시 함경도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행단도’는 다시 황해도 문회서원(文會書院)에 봉안되었다. 1866년(고종 3) 서원 철폐령이 내려진 뒤에는 완산의 향교 대성전에 옮겨 모셨다고 한다.
이 글을 쓴 필자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나[余]’로 기록하였는데, ‘행단도’를 경모한 나머지 감영의 선화당(宣化堂)으로 그림을 옮겼다고 한다. 그 뒤 화사 나능호로 하여금 한 점을 이모하여 소장하였다는 것이다. 이때가 1887년이다.
그러나 이 그림을 베껴 그릴 때의 범본(範本)이 된 원본 그림의 소재는 알 길이 없다. 함헌은 중국에서 그림을 선사받을 때 공대춘에게 작가를 물었는데, 공대춘은 오도자의 그림이라 했다고 발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1645년(인조 23)이면, 함헌의 죽은 이후의 시점이 되고, 함헌이 사행한 것은 1552년(명종 7)의 일이다. 함헌의 행적과 사실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다. 이는 아마도 오래 전의 일에 대해 쓰면서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림에 발문을 남긴 필자는 아마도 1887년의 이모본 제작을 주도한 사람으로 추측된다. 향교에 있던 그림을 감영의 선화당으로 옮겨서 이모하였다고 했는데, 이를 명할 수 있는 사람은 관찰사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따라서 발문을 쓴 필자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대형 화면의 아래쪽에는 행단 위에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둘러서 있고, 화면 위쪽에는 살구나무 가지가 어우러져 있다. 공자를 중심으로 전체적인 화면 구성이 매우 뛰어나다. 행단 주위의 바위를 그린 양식은 전통적인 청록산수(靑綠山水)의 화풍을 따랐다. 원색조의 색감이 빚어내는 장식적인 효과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인물의 얼굴과 복식 묘사에는 명암법을 넣어 입체감을 강조하였다. 살구나무는 가지의 윤곽을 필선으로 그린 뒤, 나무의 질감과 꽃망울을 매우 정교하게 묘사하였다. 행단을 떠올리는 매우 깊은 인상을 주는 부분이다.
인물의 얼굴 부분은 갈색 선으로 윤곽과 이목구비를 그렸다. 그러나 복식 부분은 먹선으로 처리하여 인체와 옷을 구분하였다. 얼굴 표정은 닮은 꼴의 동일한 얼굴이 반복되는 현상이다. 이런 특징은 불화를 그린 화승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특색과도 유사하다. 이처럼 인물과 나무에 음영을 준 입체적 표현은 19세기 후반기 회화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공자 뒤에 놓인 삽병에는 포갑(包匣)에 싼 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어 조선 말기에 유행한 책가도(冊架圖)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공자와 어울리는 상징으로 책가를 그린 점이 흥미롭다.
이 작품은 공자의 생전 일화 가운데 ‘행단예악’을 주제로 한 그림으로서 현전하는 작례(作例)가 매우 드문 사례이다. 원본을 베껴 그린 이모본이지만, 1887년의 제작 시기가 분명하고, 화가의 실명이 밝혀져 있으며, 원본이 된 그림의 전래 경위도 기록으로 남아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지방 화가의 그림으로는 19세기 당시의 서양 화법을 반영한 점 등에서 기량이 매우 뛰어난 화가의 작품에 속한다. 공자와 관련된 고사화로 분류할 수 있는 대형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