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출신 지역인 영안도(永安道 : 함경도) 출신 군사를 우대하기 위해 태종 초에 그 명칭이 생겼다. 그 뒤 세종대 이래 동북 방면의 진(鎭)을 설치하면서 점차 현지 근무로 바뀌어 갔으나, 1468년(세조 14)에 재경시위(在京侍衛)의 병종으로서 확립되었다.
이성계는 영안도 출신의 휘하 친병(親兵)을 기반으로 하여 그 군사력을 확장시켰던 것이다. 그들 영안도 출신의 군사들은 태종 때에도 가별치(加別赤)라 하여 특수한 대우를 받는 등 그 지역 출신 군사들에 대한 조선왕조의 관심이 컸다. 그 결과 이와 같은 특수 지역 출신자로 구성되는 병종이 만들어진 것이다.
『경국대전』에 ‘영안도 사람으로 제한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는 친군위는 무예가 출중해 시위(侍衛)에 적합한 자만은 아니었다고 하면서도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과 같은 위계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는 반드시 영안도 출신자에 대한 우대만이 아니라 왕실의 정보기관으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갑사(甲士)·별시위(別侍衛)의 시취과목(試取科目) 외에 철전(鐵箭)을 더 포함하고, 영안남·북도의 병사가 시취해 병조가 임명하였다. 처우는 한때 내금위와 동격이었다 하나, 『경국대전』에는 별시위와 동격으로 되어 있다.
정원은 40인으로 영안 남도와 북도에서 각각 20인씩 뽑았다. 2교대 1년 근무이므로 실제로 복무하는 인원은 20인이다. 체아(遞兒)는 종4품 이하로 20인이니 결국 당번자 전원이 종4품∼종9품의 체아록(遞兒祿)을 받는 셈이었다. 거관(去官)은 별시위와 마찬가지로 정3품에서 하도록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