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토성리 고분군 ( )

선사문화
유적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무덤군
건립 시기
초기국가시대
관련 국가
한나라
소재지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내용 요약

평양토성리고분군(平壤土城洞古墳群)은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낙랑구역 내 다른 무덤군처럼 덧널무덤과 벽돌무덤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 이행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45호에서 출토된 후한 대의 시유도기는 낙랑군에 다양한 출신의 인물들이 거주하였으며 귀향하지 않고 현지에 묻힌 사례도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무덤군은 기년명과 청동거울, 그리고 상한연대가 알려진 토기류의 출토를 통해 이 시기에 축조된 고분들의 조영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학술적 의의가 있다.

정의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
개설

평양토성리고분군은 대동강 남쪽 기슭의 낙랑군을 다스리던 곳으로 알려진 토성과 연결된 남쪽 구릉에 분포하고 있다.

토성동은 현재 폐치된 지명으로 원래는 평양시(지금의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던 지명이다. 1959년에 낙랑구역이 신설되면서 정백동과 정오동 등 5개동과 토성리, 장진리, 남사리 등 11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63년에 토성리가 토성동으로 승격되었으나, 1986년에 토성동을 정백동과 낙랑동에 분리시켜 편입시키고 정백동을 다시 정백일동과 정백이동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1991년과 1993년에도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으나 토성동은 부활하지 않았다. 결국 평양토성리고분군은 지금의 평양정백동고분군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다.

형태와 특징

토성동에서 발굴되어 학계의 특별한 주목을 끌었던 무덤으로 토성동 486호가 있다. 토성동 486호는 통일거리 중심 도로와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 교차점에서 원암 방향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지점의 구릉 동편에 자리한다. 낙랑토성에서 남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분구는 삭토되어 남아 있지 않았는데, 무덤구덩이는 동서로 3m, 폭이 2.4m, 깊이가 80㎝ 정도였다. 무덤구덩이에 설치된 덧널은 동서 방향으로 긴 형태이다. 덧널의 가운데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 칸막이벽이 설치되었다. 칸막이벽의 남쪽은 주검 칸이며 북쪽 공간은 전체가 부장 칸이다. 부장 유물은 78점이나 확인되었는데, 무기류와 장신구류, 그리고 마구와 청동 용기류 등으로 구분된다.

무기류에는 주1과 꺾창, 쇠뇌방아쇠, 철장검과 쇠칼, 쇠도끼, 쇠갈래창 등이 있다. 세형동검이 7점이나 출토된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며, 보고자는 이를 4종으로 나누었다. 도면과 사진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전형적인 세형동검이 3종이고, 촉각식동검이라고도 불리는 쌍조식동검이 1종이다.

등날의 위치에 따른 분류에서 고식이 3점이고 중간식이 2점이다. 주2 부분까지 등날이 내려오는 것도 1점이 있다. 세형동검의 주3은 돌로 만든 베개형과 청동으로 만든 십자형이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구리창은 길이 30.5㎝인 것과 26㎝인 것 2점이다. 꺾창은 도면이 공개되었는데 혈구에 생선뼈무늬가 주출된 것이다. 쇠뇌방아쇠는 청동제로 방아쇠만 남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단면이 능형인 철장검은 길이가 68㎝에 이르며, 59㎝의 철도도 1점 동반되었다. 쇠도끼는 3점 출토되었는데 단면이 사다리꼴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주조 쇠도끼일 가능성이 높다. 활촉은 돌화살촉과 구리촉, 그리고 쇠화살촉이 있다. 돌화살촉은 아래가 약간 들린 삼각촉이고, 쇠화살촉은 슴베가 있는 형태이나 부식이 심하다. 구리촉은 삼각촉이 10개이고 삼익촉이 7개이다. 쇠갈래창도 있는데 남아 있는 상태가 좋지 않다.

장신구로는 주4과 구슬, 거울이 대표적이다. 벽옥은 지름 14㎝의 원판형으로 가운데에 5㎝ 정도의 구멍이 뚫린 형태이다. 구슬은 관옥류와 수정옥으로 나누어진다. 관옥 즉 대롱옥은 24개가 출토되었는데, 배가 부른 단면 원형의 형태이고, 수정옥은 단면 6각형의 절자옥이다.

청동거울은 2점 출토되었다. 1점은 지름이 9㎝이고 뉴(거울을 매달 때 다는 고리)만 있으며 문양이 없는 형태이다. 나머지 하나는 지름이 15㎝에 이르고 뉴와 문양대 사이에 번개무늬가 있다. 그 사이에 세 마리의 용이 정삼각형으로 배치되었다.

청동 용기류 3점이 출토되었는데, 1점은 평면 타원형의 형태로 그 반쪽에 여닫을 수 있는 뚜껑이 달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원형의 고리가 달린 그릇이고, 긴 손잡이가 달린 국자도 있다. 마구류로 판단되는 쌍방울 3점이 출토되었으며, 순금덩이와 하얀 차돌이 1개 출토되었다.

토성리 486호에서 출토된 거울은 대단히 특징적이다. 일반적인 한나라의 거울이 아니라 그보다 시기가 빠른 진나라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문양이 없는 무문경은 중국 서안 남교의 진묘인 세가성성(世家星城) 163, 165 등에서 출토된 바 있으며, 번개무늬에 용이 배치된 거울 역시 진나라 양식으로 평가된다.

그 외에 대롱옥과 꺾창, 칼자루끝장식의 형태로 판단하건대 이 무덤의 시기는 낙랑군 시기보다 소급될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 2세기 대 후반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이는 위만조선의 시기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세형동검을 6점이나 부장한 것으로 보아 토착 세력의 유력자로 보인다. 중국 지린[吉林] 지역에서 유행하는 쌍조식동검과 중국 서안에서 발견되는 거울들이 출토되는 것을 보면 국제적인 면모를 지녔던 사람으로 평가된다.

토성리 4호도 주목되는데, 지금은 낙랑 38호로 불린다. 장방형의 무덤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나무 각재목으로 덧널을 만은 홀로묻기 무덤이다. 덧널은 바깥덧널과 안덧널로 구성되고, 안덧널 안에는 나무널을 설치하였다.

출토 유물에는 청동기류가 많다. 세형동검과 은제 칼집장식, 칼자루끝장식과 검코, 구리창집끝장식, 청동제의 수레 부속구 등이 있다. 청동제 성운문경과 화살촉도 주목된다. 특히 화살촉은 화살대가 부착된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쌍익촉과 단면 삼각형의 삼릉촉으로 구분된다.

동반된 토기류에는 화분모양토기와 니질계 짧은목항아리가 있다. 성운문경과 쇠칼, 화살촉의 형식 등으로 살피건대 토성리 4호는 서기전 1세기 대 전반에 조영된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토성리 45호도 중요한 무덤인데, 현재는 낙랑 13호 무덤이라 불린다. 남북으로 긴 장방형 앞방과 동서로 긴 장방형 뒷방이 연결된 2실묘의 벽돌무덤이다. ‘T’자 모양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널문과 널길은 앞방의 동벽에 마련되었는데 남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바닥에 삿자리 형태로 벽돌을 깔고 4벽을 쌓아 올렸는데 횡으로 눕혀쌓기로 일관하였다. 즉 서북한 지역에서 일반적인 ‘3횡 1수’의 쌓기가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4벽의 밑변은 직선적이고 4벽에서 배부름 현상, 즉 동장쌓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뒷방이 널방인 것으로 보이는데, 천장은 무너져 분명하지 않으나 주5일 가능성이 있으며, 뒷방은 터널형으로 판단된다.

출토 유물에는 다량의 오수전과 유약을 바른 시유도기(施釉陶器)가 주목된다. 특히 시유도기는 중국의 장강 하류역에서 후한 대에 유행하던 형식이다. 무덤의 구조는 장강 중류역에서 유행하였던 형식이라서 피장자의 출자가 중국 남방 출신임을 시사한다. 낙랑군에 다양한 출신의 인물들이 거주하였으며, 귀향하지 않고 현지에 묻힌 사례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토성리 2호는 평양토성리고분군 내에서 대표적인 벽돌무덤으로 꼽힌다. 무덤구덩이는 능선을 그대로 이용해 구축하였다. 지면으로부터 2m가 넘는 깊이로 무덤구덩이를 파고 점토로 바닥을 다진 후, 벽돌을 이용해 바닥, 네 벽, 천장을 축조하였다.

앞방의 크기는 각 변의 길이가 각각 3.3m 정도이다. 남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벽은 약 20㎝씩 불룩하게 튀어 나왔다. 바닥은 길이 30㎝, 너비 15㎝, 두께 5㎝ 크기의 벽돌을 사용해 두 겹으로 깔았다. 관을 놓은 자리에는 따로 한 겹을 더 깔아 널받침을 형성하였다. 바닥의 중앙부는 사면과 구석보다 약간 높여 자연스럽게 배수가 되도록 하였다.

널받침은 서벽에 붙여 구축하였다. 동 · 북벽에서는 50㎝, 남벽에서는 80㎝ 정도 떨어져 있다. 크기는 동서 3m, 남북 2.4m 정도이다. 널받침 위에서는 나무널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네 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안으로 휘어지도록 쌓았고, 천장은 궁륭식이다.

널길은 남벽 중앙에 설치하였다. 길이는 약 1.5m, 너비는 바깥쪽이 1.2m, 안쪽이 0.9m 정도이다. 바닥은 바깥쪽이 안쪽보다 약간 높아 경사를 이루고 있다. 바닥과 벽면 모두 벽돌을 사용하였다. 바닥은 먼저 점토로 다진 후, 그 위에 벽돌을 두 겹 깔았다. 벽은 수직으로 쌓았고, 천장은 바닥으로부터 약 1m 올라가서 궁륭식으로 축조하였다.

입구는 수직으로 벽을 세운 후, 큼직한 널돌을 덮고 그 위에 벽돌을 두 겹 정도 쌓았다. 이것은 널돌을 사용하는 새로운 수법이 이 시기에 보급되었음을 보여 준다. 앞방과 널길 입구는 모두 벽돌로 막았고 벽돌 사이의 틈에는 모래를 넣었다. 부장품은 동 · 북쪽 구석 부근과 널받침 위에 약간 놓여 있었다. 동 · 북쪽 구석에는 부뚜막 · 시루 등의 모형을 놓았으며, 널받침 위에는 오수전 · 화장품통 등의 실물을 놓았다.

토성리 3호는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으나 한 변의 길이가 약 3m인 방형의 무덤구덩이 안에 덧널을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은 1m가 넘는 철제장검과 청동거울, 귀모양잔을 비롯한 칠기들이 수습되었다. 봉토의 동쪽과 서쪽에서는 각각 1기씩의 독무덤이 발견되었다. 축조 연대는 2세기 초엽으로 보인다.

의의 및 평가

축조 연대는 대략 2세기 중엽∼3세기 초엽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은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내에 있는 다른 무덤군과 마찬가지로 덧널무덤과 벽돌무덤이 중심을 이루는 낙랑군 시기의 무덤군이다. 그중에서도 덧널무덤이 중심 묘제였다.

평양토성리고분군은 기년명과 청동거울, 그리고 상한연대가 알려진 토기류의 출토를 통해 이 시기에 축조된 고분들의 조영 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학술적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낙랑』(國立中央博物館, 2001)
『조선유적유물도감』 2(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89)

논문

정인성, 「일제강점기의 낙랑고고학」(『한국상고사학보』 71, 한국상고사학회, 2011)
정인성, 「樂浪土城의 土器」(『韓國古代史硏究』 34, 한국고대사학회, 2004)
윤광수, 「토성동 486호 나무곽무덤 발굴보고」(『조선고고연구』 4, 사회과학출판사, 1994)
주석
주1

우리나라에서 출토되는 동검의 하나. 평양을 비롯하여 전국의 고인돌ㆍ돌무덤 따위 고분의 부장품(副葬品)으로서 남만주ㆍ연해주ㆍ시베리아ㆍ북중국에서도 발견되며,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한다.    우리말샘

주2

칼, 괭이, 호미 따위의 자루 속에 들어박히는 뾰족하고 긴 부분.    우리말샘

주3

동검의 자루 끝에 청동(靑銅)이나 돌로 만들어 붙인 장식.    우리말샘

주4

벽과 옥을 아울러 이르는 말. 벽은 납작한 구슬이고, 옥은 둥근 구슬이다.    우리말샘

주5

활등이나 반달처럼 굽은 모양의 형상.    우리말샘

집필자
정인성(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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