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표류기』는 조선후기 네덜란드인 하멜이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상을 기록한 표류기이다. 1653년(효종 4) 심한 풍랑으로 난파된 네덜란드 무역선 선원 64명 중 36명이 제주에 상륙했다가 13년 28일 동안 억류되었는데, 탈출에 성공한 귀국선 서기 하멜이 억류생활 동안 보고 듣고 느낀 사실을 기록하였다. 책이 출간되자 프랑스·영국·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 다투어 번역·간행했다. 우리나라에 관한 서양인 최초의 저술로서 유럽인의 이목을 끌었다. 일부 잘못된 내용도 있지만 예리하고 세밀한 관찰을 통해 조선의 실상을 비교적 정확하고 충실하게 기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 관한 서양인의 최초의 저술로서 당시 유럽인의 이목을 끌었다.
1653년(효종 4) 네덜란드의 무역선 스페르베르(Sperwer)호[영어로는 스페로 호크(Sparrow Hawk)호]가 심한 풍랑으로 난파되어 선원 64명 중 36명이 중상을 입은 채 제주도의 대정현(大靜縣) 차귀진(遮歸鎭) 아래 대야수(大也水) 연변에 상륙했다.
그들은 체포되어 13년 28일 동안 억류되었다가 8명이 탈출해 귀국했는데, 귀국선의 서기인 하멜이 한국에서 억류 생활을 하는 동안 보고 듣고 느낀 사실을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예리하고 세밀한 관찰을 통해 조선의 실상을 비교적 정확하고 충실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어떤 내용은 잘못 인식되어 전혀 달리 전달된 사례도 있다.
책의 내용과 간행 경위는 다음과 같다. 1653년 1월 10일 네덜란드를 떠난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호는 6월 1일 자바섬의 바다비아(Badavia)에 도착했다. 선원들은 그 곳에서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총독 명령에 따라 스페르베르호로 대만[臺灣]의 안핑[安平]으로 향발, 6월 14일 도착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대만의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는 네덜란드인 레세르(Lesser, C.)를 임지로 데려다주는 일이었다. 임무가 끝나자 다시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7월 30일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출항했다. 그러나 풍랑이 심해 8월 11일까지도 스페르베르호는 대만 해협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8월 15일 풍랑은 더욱 심해 선미(船尾)의 관망대가 떨어져 나갔고, 탈출용 작은 배도 잃어버렸다. 배 안에 물이 스며들어 어찌할 수 없게 되자, 선원들은 짐과 돛대마저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한 선원이 육지가 보인다고 외쳤는데 그 곳이 바로 제주도 남해안이었다.
정박을 시도했으나 혹심한 풍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이, 거대한 파도가 거듭 선창으로 밀려들어 드디어 스페르베르호는 난파되고 말았다. 64명의 선원 가운데 28명은 익사하고, 육지에 오른 생존자 36명은 서울로 호송되었다. 서울에서 2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다가 1656년 3월 전라도로 옮겨졌다.
그동안 14명이 죽고, 다시 1663년 생존자 22명은 여수 · 남원 · 순천으로 분산, 수용되었다. 이들은 잡역에 종사하면서 길고긴 고난의 억류 생활을 계속했는데, 어느 때는 구걸에 나서기도 하였다. 1628년(인조 6)에 표류한 같은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Weltevree, 朴燕)를 만났으나 동포를 만난 감격도 잠시일 뿐 고통스러운 생활은 계속되었다.
하멜이 억류 생활을 한 곳은 전라도 여수 좌수영이었다. 다행히 작은 배 한척을 마련해 먹을 것을 구하느라 부근의 섬들을 내왕하면서 조수 · 풍향 등을 잘 알게 되었다. 탈출 직전까지의 억류 생존자수는 모두 16명이었다.
탈출 비밀이 탄로날까 두려워 전원이 탈출하지 못하고 8명만이 1666년(현종 7) 9월 4일 야음을 틈타 탈출에 성공, 일본의 나가사키를 경유해 1668년 7월 암스테르담에 귀환했다. 탈출에 가담하지 않았던 나머지 8명도 2년 후 조선 정부의 인도적인 배려로 석방,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책에는 이들의 귀환 사실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에서 끝내 죽은 줄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은 1668년 암스테르담에서 3개 출판사에 의해 동시에 출간되었다. 이때 하멜은 13년 이상의 밀린 봉급을 동인도회사에 요구하느라 미처 고국에 돌아오기 전의 일이었다.
『하멜표류기』 정본(正本)은 1920년 회팅크(Hoetink, B.)에 의해 발간되었다. 정본의 내용 구성을 보면, 제1부는 난파와 표류에 관한 기술, 제2부는 「조선왕국기(朝鮮王國記)」로 되어 있다. 제2부는 한국의 지리 · 풍토 · 산물 · 정치 · 군사 · 풍속 · 종교 · 교육 · 교역 등을 소개하고 있다.
책의 저자가 거의 14년 동안 군역 · 감금 · 태형(笞刑) · 유형(流刑) · 구걸 등의 모진 풍상을 겪으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을 하였고, 남북의 여러 지역을 끌려 다니면서 당시 풍물과 풍속에 대한 사정을 관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대한 깊은 인상과 풍부한 경험을 잘 살려 기록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한국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깊지 않았던 서양 사회에 한국을 알리는 최초의 저서로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책은 프랑스 · 영국 · 독일 등 서양의 많은 나라들이 다투어 번역, 간행했고, 우리나라에서도 1934년 『진단학보』 1∼3호에 이병도(李丙燾)가 영역본(英譯本) · 불역본(佛譯本)을 저본으로 번역, 전재했다.
그 뒤 『하멜표류기』가 일조각(一潮閣)에서 1954년에 간행되었고, 일본에서는 1961년 이쿠타[生田滋]가 『조선유수기(朝鮮幽囚記)』라는 제목으로 번역, 간행했다.
1980년 10월 12일 한국과 네덜란드 양국은 우호 증진을 위해 각각 1만 달러씩을 출연해 난파상륙 지점으로 추정되는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 언덕에 높이 4m, 너비 6.6m의 하멜기념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