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1책. 목판본. 1838년(헌종 4) 후손 이기영(李璣永)·이효순(李孝舜)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조긍섭(曺兢燮)·김도화(金道和)·이만도(李晩燾)의 서문과 권말에 이효기(李孝驥)·이효태(李孝泰)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연세대학교 도서관·영남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에 시 11수, 서(書) 7편, 기(記) 1편, 제문 2편, 권2는 부록으로 연보·행장·묘갈명·만사·제문·기(記)·개기문(開基文)·상량문·봉안문·축문 각 1편, 권3 역시 부록으로 차운시(次韻詩) 15수, 기 1편, 상량문 1편, 수연시(壽讌詩) 18수, 수연기(壽讌記) 1편, 서(序) 2편, 사우종유록(師友從遊錄)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의 「제행정(題杏亭)」이라는 작품은 유명하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치욕을 듣고 벼슬에서 물러나 소옥(小屋)을 지어 ‘杏亭(행정)’이라 편액하고 지은 시다. 자신의 청렴결백한 기개와 충의 정신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민족의 시련기에 지식인이 어떠한 자세로 처신했던가를 보여 준 작품이다.
“죽더라도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살아서는 마땅히 안빈낙도하리라/수레를 돌려 멀리 가지도 않았는데/세로(世路)는 티끌과 시끄러움이 많구나(死可飢周粟 生當掛氵+潁瓢 回車及未遠 世路多塵囂)”라는 짧은 내용이지만, 작가의 정신 세계를 응축시켜 놓은 작품으로 후대 사람들이 많은 차운시를 지을 정도로 알려진 시다.
이현일(李玄逸)과 이재(李栽)는 그와 척족(戚族)이 되기 때문에 차운시를 지었고, 이 밖에 부록에 실린 차운시가 그것이다. 또, 「수비산연구(首比山聯句)」도 저자가 영양(英陽)에서 삼종숙 시명(時明)을 방문하고 당시 유명한 홍우정(洪宇定)과 함께 지은 것으로, 당시 의리로 뭉친 선비들의 기개를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 밖에 「행정기(杏亭記)」는 저자가 당호(堂號)를 짓게 된 내력과 행정의 함의를 문답 형식으로 설명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