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로는 중앙에 향관청이 있고 뜰 아래에 동서월랑(東西月廊)이 있으며, 그 아래로 포주(庖廚)가 있다.
본청은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어 다음날 봉행할 향(香)과 축(祝)을 봉안하고, 그 좌우에 있는 방은 향사에 임하는 향관들이 재계하며 거처하는 방이며, 동서월랑은 다음날 행사에 임하는 감찰과 집사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홍귀달(洪貴達)이 쓴 『향관청기(享官廳記)』에 의하면, 옛날 성균관에는 향관청이 없었는데 전 대사성 성현(成俔)이 경연에 아뢰기를, “해마다 춘추의 중궐(仲月) 상정(上丁)과 삭망을 이용하여 선성선사(先聖先師)에게 향사 올림을 충실하게 하는 헌관과 집사들이 청재할 곳이 없어 향사 때가 되면 제관(祭官)들이 동재(東齋) · 서재(西齋)를 빌려 우거하여 그 재실의 학생이나 집사가 된 학생들은 관노(館奴)의 집을 빌려 거처하게 되니 정결을 다하여 향사를 올린다는 의의에도 어긋나니, 별도로 향관재(享官齋)를 지어달라.”고 진언, 국왕의 허락을 얻어 성현 · 한치형(韓致亨) · 정문형(鄭文炯) · 이극증(李克增) 등에 의하여 1474년(성종 5)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1653년(효종 4) 대사성 이일상(李一相)의 진언에 의하여 중건되었으며, 1740년(영조 16)영조가 석전(釋奠)에 친림하여 ‘享官廳’이라 어제하였다. 1966년에 파괴된 동서월랑과 포주는 1986년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의 보조로 동서월랑만 중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