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덕휘(德輝), 호는 창주(滄洲). 허순(許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허팽령(許彭岭)이고, 아버지는 찰방 허홍재(許洪材)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윤언례(尹彦禮)의 딸이다.
처음 노흠(盧欽)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흘(李屹)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16년(광해군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에 임명된 뒤 성균관박사를 거쳐 예조정랑을 역임하였다.
그 때 폐모설이 나오자 인륜의 기강이 무너졌다고 크게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와림천(臥林泉)에서 부모를 봉양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623년(인조 1)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여 전라도사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7년 남한산성에서 강화조약이 이루어지자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며, 또 친구 임진부(林眞怤)에게 준 시 300구절에서는 모두 시대를 한탄하고 나라를 걱정하였다. 고암서원(古巖書院)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창주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