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빈당은 1900년 충청남도 일대에서 시작하여 남한 각지에서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의 기치를 들고 봉기했던 무장민중집단이다. 허균의 「홍길동전」에도 나오는 명칭이다. 탐관오리와 부정축재한 부호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불우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사회에 활력을 넣겠다는 공상적 사회주의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부패한 위정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피지배층으로부터는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동학혁명군과 화적 출신들이 많이 가담하였다. 민중항쟁의 한 형태로 반제·반봉건 투쟁의 대표적 표본이었다.
활빈당은 13개조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자연평등’과 ‘빈부타파’ 및 ‘국가혁신’을 외쳤다. 그들은 축재한 사람들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불우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사회에 활력을 넣겠다는 소박한 공상적 사회주의사상(空想的社會主義思想)을 가지고 있었다.
가축을 살해해 활인(活人)을 시키는 것은 어진 일이며, 비록 남의 재물을 빼앗기는 해도 활빈(活貧)을 했으니 의로운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위정자들이 규정한 표략(剽掠)이나 노략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활빈당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의 부패한 위정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피지배층으로부터는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충청남도의 내포 지방과 충청북도의 보은 지방, 전라도의 지리산 지방 및 익산 · 고산 · 여산 · 장성 · 순창 · 담양 · 운봉 · 정읍 · 남원 · 함평 · 영광 · 무주 · 구례 등지와 경상도의 경주 · 하동 · 양산 · 언양 · 울산 등지에서의 활동은 치열하였다.
이들의 활동 지역이 동학혁명 · 남학당(南學黨) · 영학당(英學黨) 등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지역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활빈당은 수십 명으로부터 크게는 700∼800명으로 조직되었고, 해상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육혈포(六穴砲)로 무장한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화승총과 도창(刀槍) 및 구청제군총(舊淸製軍銃) 등을 소지하였다. 기타의 군총도 약간 소지했으나 일반적으로 원시적 무기를 사용하였다.
활빈당에는 동학혁명군과 화적(火賊) 출신들이 많이 가담해 있었다. 출신지는 일정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모인 혼합부대였다. 또한, 활동 범위도 제한된 지역이 아니라 각지를 기동적으로 움직여 다니는 게릴라부대였다.
이러한 점은 이전의 화적이나 민란 부대가 지방적 한계를 넘지 않았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들은 일정한 제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관에서 식별하기 어려웠고, 그만큼 활동이 쉬웠다.
활빈당의 투쟁 대상은 지배층이었고, 탐관오리와 부정축재한 부호였다. 그들의 전곡(錢穀)과 원한이 사무친 관아는 좋은 공격 목표였다. 관아나 부호를 기습하거나, 요구조건을 미리 통지하고 통고 시각에 나팔을 불고 총을 쏘면서 들이닥치기도 하였다.
악질 수령과 부호들을 경우에 따라서는 처치하기도 하였다. 금품은 주로 전곡을 탈취당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다. 예외적으로 큰 절을 습격, 비축해 놓은 곡식을 빼앗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활빈당의 목적이 부자의 재물을 거두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풂으로써 생계의 수준을 균등히 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활빈당은 위정자들에 의해 모욕적으로 낙인찍힌 일반 도둑의 무리나 폭도 혹은 비도(匪徒)가 아닌 정치적 성향을 띤 의군(義軍)이었던 것이다. 활빈당은 농민이나 행상인의 금품은 빼앗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대중들의 호응을 얻어 그 세력을 대중 속에 뿌리박을 수 있었다.
중앙정부가 크게 놀라서 각지의 지방군을 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세력은 점차 확산되어갔다. 1900년에서 1904년에 걸친 5년 동안은 활빈당 활동의 최고조기였다. 당시의 모든 반봉건 · 반제 운동이 활빈당의 투쟁으로 결집되어 기세가 대단하였다.
1904년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가 체결된 뒤 활빈당의 투쟁은 의병운동 대열에 흡수되어 반일무장투쟁의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 점은 의병투쟁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또, 다른 민중봉기군보다 주목받는 것은 반봉건 · 반제국주의적 투쟁 목표와 선명한 행동 및 조직 활동에 있다. 그들은 투쟁과정에서 선언서와 13개조의 강령을 발표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선언서와 강령인 「13조목대한사민논설(十三條目大韓士民論說)」은 바로 활빈당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들은 개항 이후의 외국자본의 침식과 일제의 주권 침해를 통박하면서 정치적 개선을 강력히 주장하고, 이에 대한 시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특히, 빈부의 타파 및 국가혁신을 지상적 이상(至上的理想)으로 하고, 이것을 지배층에서 이루어준다면 다시 초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근왕적 왕도사상이 농후한 것은 반봉건성의 제약임에는 틀림없으나 당시의 상황에서는 긍정성을 가지고 있다.
이상에서 볼 때 활빈당의 활동은 동학의 일관된 혁명적 요구들을 이어받은 것으로 주목된다. 그러면서도 그 조직성과 투쟁력 및 선명성은 진일보한 민중항쟁의 형태로서 한국근대 사상 반제 · 반봉건 투쟁의 대표적 표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