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효공 ()

유교
인물
조선 전기에, 교리, 종부지첨정, 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하였으며, 『구암일고』 등을 저술한 문신.
이칭
경보(敬甫)
구암(龜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96년(연산군 2)
사망 연도
1553년(명종 8)
본관
창원(昌原)
출생지
영주
주요 관직
한성부서윤|종부시첨정|사간원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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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교리, 종부지첨정, 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하였으며, 『구암일고』 등을 저술한 문신.
개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보(敬甫), 호는 구암(龜巖). 영천(塋川: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생. 아버지는 군자판관(軍資判官) 황진(黃璡)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현감 이평(李泙)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1년(중종 16)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22년 승문원부정자가 된 뒤 1525년 성균전적, 1526년 형조좌랑을 거쳐 형조정랑·황해도사·교리·지평 등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532년 금산군수, 1534년 한성부서윤·종부시첨정을 거쳐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이때 생질이 권신들의 미움을 받아 함께 탄핵, 파직되자 영천으로 낙향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구암’이라 자호하여 독서와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537년 복작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독서로 일생을 보내며, 『역학계몽(易學啓蒙)』·『황극경세(皇極經世)』·『태극도(太極圖)』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황(李滉)과도 교유하였으며, 도상학(圖象學)과 역학에 밝았다. 영주의 사계서원(泗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구암일고(龜巖逸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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