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유가면 양리 비슬산 유가사에 봉안된 1구의 석조여래좌상으로, 원래 비슬산 기슭에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 불상은 신체 표현과 수인, 편단우견의 불의 등에서 10세기 고려 초의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3단의 방형대좌 위에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결한 불상이다. 상호와 양 무릎을 시멘트로 보수하였으며 대좌의 중대석도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특히 불상의 상호에서 원래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육계는 낮고 작으나 나발은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양 귓불이 짧은 점이 시선을 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처럼 표현되었으며, 허리가 잘록하게 표현되어 신체의 양감을 다소 느낄 수 있다.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이며, 왼손은 오른발 위에 어색하게 꺾인 채로 놓여 있다. 불의(佛衣)는 편단우견으로, 가슴의 대부분과 어깨 일부가 드러나 있고 등도 많이 노출되어 있다. 이런 특징은 괴산의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대좌는 3단의 방형대좌이며, 각각 별석(別石)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대는 16엽(葉) 단판연화문이며, 그 안에 나뭇잎과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2단의 각형괴임대가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각 면에 우주를 조각하였는데, 각각 그 안에 1구의 공양자상과 3구의 천인상이 고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공양자상은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이며, 천인상은 휘날리는 옷자락이 날렵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팔각연화대좌의 예가 많이 남아 있고 상대적으로 방형대좌의 예는 많지 않은데, 통일신라 9세기의 합천 청량사 석조여래좌상이 대표적이며, 고려시대에는 김천 청암사 수도암 석조보살좌상, 예천 청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의 상호와 양 무릎은 시멘트로 보수되어 불상의 상호에서 원래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고, 대좌의 중대석도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본격적인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어 10세기 고려 초의 불상으로 편년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이 불상은 위축된 어깨와 밋밋한 신체 표현, 부자연스러운 수인, 갸름한 얼굴형에 짧은 귀, 신체를 많이 노출한 편단우견의 불의 등에서 괴산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산청 사월리 석조여래좌상 등 나말여초 10세기의 불상과 유사하여 이 시기 불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