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대의 문신 김종한의 집안에 전해지는 것으로, 2004년 5월 7일 2종 6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중 계회도는 이옥녀(李玉女)가 쓴 제시(題詩)의 관지로 보아 1488년(성종 19) 사헌부에 속한 관원의 계회를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교지는 계회에 참여하였던 김종한 관련 자료 5점으로, 모두 직첩에 관한 것이다.
계회도의 크기는 세로 98.5㎝, 가로 22㎝로, 족자로 꾸며진 세로로 긴 화면을 5등분하여 위로부터 계회도, 제시, 참석자의 좌목(座目), 참석자의 부친에 대한 기록, 추기(追記:본문에 덧붙여서 씀. 또는 그런 문장)로 구성되어 있다. 하단의 추기는 후손에 의하여 정서된 것으로 위의 글보다 후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작성연대는 알 수 없다. 이 계회도는 그림보다 참석자의 좌목과 제시 부분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서로 쓴 제시는 조선화된 송설풍(松雪風)과 왕희지(王羲之) 풍이 어우러진 높은 격조를 보여준다. 상단의 제액(題額)은 단정한 전서로 쓰여졌고, 정방형의 결구에 획의 처음과 끝을 힘주어 마무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교지의 주인공인 김종한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전해지지 않으나 계회도와 교지의 내용에 의하면, 본관은 상주(尙州)[상산(商山)], 자는 종해(宗海), 그리고 부친은 교위 김하(金遐)임을 알 수 있다. 1465년(세조 11) 문과에 합격하고 선무랑훈도를 거쳐 1468년(세조 14) 종사랑훈도를 지냈으며, 1505년(연산군 11) 성균관사성으로 치사하였다. 김종한의 교지 5점은 1488년부터 1499년 사이에 발급된 것으로 대부분 김종한이 장년시절에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계회도의 화면의 중심을 약간 왼쪽으로 치우치고 상단과 왼쪽에 여백을 살린 구도는 남송시대 마하파(馬夏派) 화풍의 영향이고, 구불구불한 선으로 바위와 언덕을 묘사한 표현기법은 북송대 이곽파(李郭派) 화풍의 특징이다. 이 두 화풍을 융합하여 전반적으로 간략하게 묘사한 점에서 15세기 후반 조선화된 화풍을 엿볼 수 있다.
계회도 중 석축으로 쌓은 기단에 크고 작은 지붕을 결합하여 공간을 구성한 정자의 표현에서 15세기의 관아건축 면모를 알 수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계회도 가운데 매우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15세기 계회도의 형식과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있다. 교지는 김종한이 장년시절에 받은 직첩 내용을 보여주고 있어 당시의 정치사회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