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광주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1944년 광주사범학교 강습과에 입학했다. 1945년 목포북교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6월에 일본군에 소집당해 복무 중 해방을 맞았다.
1946년 9월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후 ‘연희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여 연극활동을 시작했다. 1949년엔 각 대학의 연극학도 김경옥 · 조동화 · 최창봉 · 박현숙 등과 ‘대학극회’를 조직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목포로 피난하여 5년간 목포중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51년 처녀작 「별은 밤마다」를 목포문화협회 주최 ‘예술제’에서 공연했고,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밀주」가작,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귀향」이 당선되어 극작가로 등단했다.
1956년 5월엔 김경옥 · 최창봉 · 오사량 · 조동화 등과 소극장운동을 표방한 극단 ‘제작극회’를 창단했다. 1963년에는 연극의 대중화를 표방하며 오화섭 · 김유성 · 이기하 · 임희재 등과 극단 ‘산하’를 창단하고, 극작가 · 연출가 · 극단 대표로 활동했다. 1984년엔 청주대학교 예술대학장, 1989년 서울예술전문대학 극작과 교수로 활동했고, 2000년엔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에 취임했다.
주요 희곡집으로 『껍질이 째지는 아픔없이는』(1961), 『대리인』(1969), 『환상여행』(1975), 『학이여, 사랑일레라』(1981), 『식민지의 아침』(1992), 『통곡의 땅』(2000), 『옥단어!』(2003) 등이 있다.
그 외에 평론집 『동시대의 연극인식』(1987), 『한국소극장연극사』(2004), 수필집 『거부하는 몸짓으로 사랑했노라』(1984), 『목포행 완행열차의 추억』(1994), 자서전 『예술가의 삶』(1993), 『떠도는 산하』(1998) 등이 있다.
시대변화 혹은 전쟁으로 인한 가정의 해체와 신구세대의 갈등을 주로 다루었으며, 전형적 인물창조와 토속적 정취를 탄탄한 사실주의적 극작술로 그려냄으로써 유치진을 잇는 전후 대표적 사실주의 극작가로 자리매김 하였다.
흑산도 어촌을 배경으로 가짜 밀주 단속반의 횡포를 토속적 대사로 그린 「밀주」, 낡은 가치와 새로운 가치의 대립을 신구세대의 갈등으로 포착한 「불모지」(1957), 이데올로기 갈등과 민족분단의 비극을 남녀의 원초적 애욕갈등 속에 담은 「산불」(1962)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특히 「산불」은 탄탄한 극적 구조와 인물창조로 한국 사실주의극의 대표적 성취이자 희곡작법의 모범으로 평가받는다.
1962년 목포시 문화상, 1970년 제2회 대한민족문화예술상 연극부문을 수상했다. 이후 1981년 「학이여 사랑일레라」로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상, 198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3년 제7회 동랑연극상, 1991년 「식민지의 아침」으로 대한민국문학상 본상, 1993년 제3회 이해랑연극상, 1997년에는 서울시문화상을 각기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