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화엄사 대웅전 내 수미단 위에 봉안된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1697년에 간행된 『해동호남도대화엄사사적(海東湖南道大華嚴寺事蹟)』에 의하면 1636년경에 수화승(首畵僧) 청헌(淸憲)을 비롯하여 부화승(副畵僧) 영이(英頤), 인균(印均), 응원(應元) 등이 제작하였다.
화엄사는 16세기 말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 중에 파괴되어 1630년대 부휴문도인 벽암각성(碧巖覺性) 등의 고승대덕(高僧大德)이 중창하였다. 이 사찰의 중심 전각인 대웅전(大雄殿)의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은 조성발원문이 조사되지 않았지만, 1697년경에 간행된 『해동호남도대화엄사사적』 내용 가운데 “…自庚午大師之來 六七年之間… 佛像大化士 懶黙與希寶 邀請淸憲英頤印均應元等 傳得栴檀像 手才蘇之塗圓滿三十二相(자경오대사지래 육칠년지간… 불상대화사 나묵여희보 요청청헌영이인균응원등 전득전단상 수재소지도원만삼십이상)”이라 적혀 있어 1636년경에 나묵(懶黙), 희보(希寶) 등이 발원하여 수화승(首畵僧) 청헌(淸憲)을 비롯하여 부화승(副畵僧) 영이(英頤), 인균(印均), 응원(應元) 등이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에 봉안된 불상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싼 지권인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중심으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와 상품중생인(上品中生印)을 취한 노사나불(盧舍那佛)로 이루어진 삼신불이다. 조선후기 불교미술사에서 도상적으로 법신, 보신, 화신(응신)을 그린 삼신불 불화는 많이 남아있지만, 불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특히 보관을 쓴 노사나불은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본존은 얼굴을 약간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은 머리에 소라모양의 나발(螺髮)이 촘촘하지만 육계(肉髻)의 표현이 명확하지 않고, 노사나불은 화려한 보관(寶冠)을 쓴 보살형으로 제작되었다.
비로자나불과 석가불은 머리 정상부에 원통형의 커다란 정상계주(頂上髻珠)와 이마 위에 반원형의 중앙계주(中央髻珠)를 가지고 있다. 얼굴이 방형으로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자락의 옷깃이 목 주변에서 바깥으로 역삼각형으로 접혀 동일한 두께로 가슴부위까지 길게 늘어져 있고, 끝부분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뒤쪽으로 두 가닥의 주름이 접혀 있다. 지권인을 한 손목에 걸친 대의자락은 네 겹으로 자연스럽게 접혀 있고, 하반신을 덮은 대의자락이 배 부분에서 향좌측으로 거의 동일한 두께로 늘어져 있다. 그러나 노사나불은 하반신을 덮은 대의자락이 배 부분에서 내려오는 것은 다른 두 불상과 같지만, 향좌측으로 넓게 펼쳐져 끝에서 모여 반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대의 표현은 응원(應元)이 1624년에 제작한 순천 송광사 광원암 목조불좌상과 동일하다. 비로자나불은 대의 안쪽에 편삼을 입었지만, 석가모니불은 편삼을 착용하지 않았다.
이 삼신불좌상은 조선후기 불상 가운데 우수한 조형미를 가진 불상으로, 존상의 인상(印象)이나 대의 표현 등에 차이점이 있어 1675년 전남 고흥 능가사 불상이나 1703년 구례 화엄사 각황전 삼존·사보살상과 같이 각각의 불상에 개별 수화승을 두고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