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사 당시 대부분의 복장(腹藏) 유물은 이미 도난된 상태였으나 무릎과 머리쪽에 들어있던 복장물이 발견되었다.
복장물은 10종 194점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은 고려 목종(穆宗) 10년(1007)에 개성 총지사(摠持寺)에서 판각된 것으로 권자본(卷子本)이 아니라 낱장으로 몇 장씩 뭉쳐서 나온 것으로 보아서 나중에 보살상의 복장에 넣기 위해 인출(印出)한 것으로 생각된다. 낱장 상태의 『범서총지집(梵書摠持集)』은 결장(缺張)된 부분도 있으나 모두 142장이 나왔다. 권말에는 의종(毅宗) 4년(1150)으로 추정되는 경오(庚午)년에 평양 광제포(廣濟鋪)에서 개판인시(開板印施)되었고, 선사사원(禪師思遠)이 교정을 보았다고 밝히고 있다. 이외에도 숙종(肅宗) 1년(1095)에 판각된 『정원신역화엄경소(貞元新譯花嚴經疏)』권6이 포함되어 있으며, 견사[羅]로 만든 고려시대의 홑적삼 저고리[塔胡]도 들어 있었다.
관음보살상은 머리와 신체가 균형 잡힌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 동안 두껍게 입혀져 있던 개금을 벗기자 원래 입혀져 있던 칠 상태가 나타났고 세부의 섬세한 표현이 잘 드러나게 되었다. 양 뺨에 살이 있는 동그란 얼굴에 입술선이 부드러우며 이마에서 콧날까지 편평하게 뻗은 코와 도톰하게 살집이 있는 턱의 표현에서 자비로운 보살의 이미지가 잘 표현되어 있다. 또한 X선 촬영을 통해서 앞의 봉정사 목조보살좌상이나 개심사,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처럼 눈동자에 수정을 박은 것이 밝혀졌다.
머리에는 보계(寶髻)가 높게 올려져 있고 그 위에 초화문(草花紋)이 투각된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착의 형태는 여래상의 가사와 같은 윗옷 위에 한 벌의 옷을 더 입었는데 이것은 13세기 여래상의 착의 형식과 같다. 양손으로는 엄지와 검지를 맞댄 설법인(說法印)을 맺고 있으며 손의 형태가 정교함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서 나중에 보수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특히 가슴과 어깨, 배, 무릎 위, 등 뒤에는 영락(瓔珞) 장식이 늘어져 있고 복부 왼편 위쪽에는 내의(內衣)의 치레장식이 붙어 있다.
보광사 관음보살상은 이 절에서 가까운 안동 용수사(龍壽寺)에서 30∼40년전 쯤에 옮겨왔다고 전하고 있어, 이 보살상의 조상배경에 대해서는 용수사와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용수사는 의종(1148∼1170년 재위)의 후원으로 중수된 사찰인데, 1187년용수사가 완공되고 나서 의종의 추선(追善)을 위한 원찰이 되었다. 보광사 관음보살상의 복장에서 의종대에 개판된 『범서총지집』(1150년)이 다량 발견된 점은 이 보살상과 용수사를 중창한 의종과의 관련성을 뒷받침될 수 있을 듯하다. 특히 의종은 관음신앙에 심취하여 그 재위 연간에는 다른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수의 관음보살상이 조각과 회화로 제작, 유포되었고, 1151년에는 개경의 장인으로 하여금 침향목으로 관음상을 만들게 하여 봉안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최선(崔詵)이 지은 「용두산용수사창건비(龍頭山龍壽寺創建碑)」에 의하면 1165년용수사에 목조도금상이 조성되었고, 이 상의 존명은 알 수 없으나 의종과의 연관성에서 생각할 때 관음보살상이라고 생각되므로 현존하는 보광사 관음보살상과도 연결지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한 보광사 상의 재료가 향목이라는 점은 의종이 개경에서 침향목의 관음보살상을 조성한 사실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보살상은 고려 중기(12세기 후반-13세기 초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안동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2009년 지정) 와 함께 고려 중기를 대표하는 보살상으로 가치가 높다. 기품 있고 우아한 자태의 보광사 관음보살좌상은 당시 중앙지역 불교조각의 귀족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