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널리 성행했던 아미타신앙을 보여주는 예로서 현존하는 고려시대 목조불상 가운데 그 조성시기가 상당히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개심사에는 조선초기 성화 20년(1484)에 중수된 대웅보전이 있으며, 그 안에는 목조아미타불좌상, 관음보살입상, 지장보살입상의 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크기의 비례로 보아 삼존상이 처음부터 함께 조성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대웅보전에는 원래 석가불이 본존으로 모셔져야 하는데, 현재 아미타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는 점은 사찰의 중수가 이루어지면서 존상들의 봉안 위치에 변화가 생겼던 것으로 짐작된다.
아미타여래좌상은 몸을 앞으로 숙인 자세로 앉아 있고 어깨는 몸에 비해 좁고 둥글게 처졌으며 두 손으로는 설법인(說法印)을 결하고 있다. 머리에는 정상계주(頂上髻珠)와 중계주(中髻珠)가 표현되어 있으며 머리와 육계(肉髻)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얼굴은 반듯한 이마와 반쯤 뜬 두 눈, 우뚝한 콧날과 뚜렷한 인중, 부드러운 입술, 살이 적당한 뺨 등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로운 상호(相好)를 보여주며, 불상의 눈동자에는 수정을 박아 넣었다.
아직까지 아미타불상의 복장(腹藏) 유물이 조사되지 않아 불상 조성의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불상의 바닥에 뚫려 있는 복장 구멍을 막은 봉함목의 안쪽에 지원(至元) 17년(1280)의 개금묵서명이 있어 중수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묵서명은 이미 지워져서 보이지 않거나 판독되지 않는 글자도 있으나,
“지원십칠년경진십일월(至元十七年庚辰十一月) 십사일별립승재색(十四日別立僧齋色) 수보개심사당주(修補開心社堂主)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 법회(法回) 김▣백□(金□白□) 내시시흥위위장사송(內侍試興威衛長史宋□) □□□내시별잡□박□(□□□內侍別雜□朴□)”로 읽을 수 있다. 이 내용은 이 아미타불좌상이 충렬왕 6년인 1280년에 보수되었고 개심사 금당의 주존(主尊)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사(佛事)의 주체는 승재색(僧齋色)이라는 임시로 설치된 기관으로 경전의 간행, 사찰의 중수, 불상의 개금과 보수, 불교 재의(齋儀) 등을 담당하던 관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개심사 아미타여래상의 보수를 담당하였던 인물은 내시(內侍)이자 중앙군단 흥위위(興威衛)의 장사(長史)라는 직위를 가진 송씨(宋氏) 성(姓)의 인물과 그 휘하의 무관들이었다고 생각된다.
개심사 아미타여래좌상의 보수작업이 승재색의 주관으로 이루어져 내시이면서 중앙군 소속의 무관직인 장사직을 겸한 인물에 의해 진행되었다면 이 불사는 중앙왕실과 관련이 있을 개연성이 있다. 이를 말해주듯이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단엄한 자태를 보이고 상호표현에서부터 세부조각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조형감을 보여주고 있어 현존하는 고려후기 목조여래좌상 가운데 조각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