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불화엄경소 권21, 24 ( , )

불교
문헌
14세기 경, 송나라 승려 정원이 쓴 80권본 『화엄경』 본문과 이에 해당하는 징관의 주석서 『대방광불화엄경소』를 나누어 편집한 책을 목판으로 인출한 불교 논서 중 일부.
문헌/고서
편찬 시기
11세기말
간행 시기
14세기경
저자
징관
편자
정원
권책수
2권 2첩
권수제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판본
목판본
표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도서관
내용 요약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권21, 24는 송나라 화엄학승 정원(淨源, 1011~1088)이 쓴 80권본 『화엄경』의 본문을 나누고, 그 아래에 80권본 『화엄경』에 대한 징관(澄觀, 738~839)의 주석서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의 해당 부분을 실은 총 120권의 주석서 중 제 21·24권에 해당한다. 보물 제1128호이다.

정의
14세기 경, 송나라 승려 정원이 쓴 80권본 『화엄경』 본문과 이에 해당하는 징관의 주석서 『대방광불화엄경소』를 나누어 편집한 책을 목판으로 인출한 불교 논서 중 일부.
개설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권21, 24는 송나라 화엄학승인 정원(淨源, 1011~1088)이 쓴 80권본 『화엄경(華嚴經)』의 본문을 나누고, 그 아래에 80권본 『화엄경』에 대한 징관(澄觀, 주1의 주석서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의 해당 부분을 실은 총 120권의 주석서 중 제 21 · 24권에 해당한다. 보물 제1128호이다.

참고로 80권본 『화엄경』은 당의 주2국호를 주(周)로 정했을 때 한역한 것에서 유래하여 '주본(周本) 『화엄경』'이라 칭하기도 한다. 또한 모두 80권으로 이루어져 있어 '80권본 『화엄경』' 또는 '『팔십화엄경』'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80권본 『화엄경』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주3가 418~420년에 번역한 진본(晉本) 『화엄경』에 이어 새로 번역된 것이다. 이에 대한 주석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징관이 쓴 『대방광불화엄경소』이다.

대각국사 의천은 송나라 유학 시절 당시 화엄학의 대가인 정원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의천은 송의 혜인원에 머무는 동안 정원이 엮은 『대방광불화엄경소』 1질 120권을 정원 본인으로부터 기증받았다. 의천은 귀국하기 전에 그 주4의 판각을 항저우[杭州]의 각수 엄명(嚴明) 등에게 주문하였다. 이후 정원은 1087년(선종 4) 3월 송나라 선상(船商)인 서전(徐戩) 등을 통해 모두 2,900여 판에 이르는 목판(木板)을 고려의 의천에게 전달하였다.

1424년(세종 6), 대장경판을 달라는 일본에 끈질긴 요청에 이 목판을 대신 주어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목판들은 일본 교토 쇼코쿠사[相國寺]에 비치되었으나 후에 화재로 전부 소실되었다. 따라서 이 목판은 불교를 통해 동양 3국이 문화적으로 교류하였음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대방광불화엄경소』 권68은 14세기에 개성(開城)에서 『대방광불화엄경소』 120권본 전체 목판을 인출(印出)한 것 중에서 제 21 · 24권을 각각 1권 1첩(帖)의 주5으로 만든 것이다. 이 책은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지사항

『대방광불화엄경소』 권21, 24는 목판본이다. 절첩장(折帖裝)의 형태로 장정되어 있다. 권21과 24의 판식(版式)은 테두리마다 하나의 검은 선을 돌린 상하단변(上下單邊)으로 되어 있으며, 본문은 검은 선이 있는 주6에 20행 14∼15자,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되어 있다. 장(張)의 크기는 32.7㎝✕53㎝이며, 광고(匡高)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권21은 23.8㎝이며, 권24는 23.4㎝이다.

내용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줄여서 『화엄경(華嚴經)』이라고 약칭(略稱)한다. 이 『화엄경』의 중심 사상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不二]’라는 것이다. 『화엄경』은 화엄종(華嚴宗)의 근본 경전으로 주7과 함께 한국의 불교 사상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의의 및 평가

의천의 요청으로 중국 송나라에서 판각되어 1087년 경에 고려에 수입된 『화엄경소』 120권 목판을 보통 '주화엄경판(注華嚴經板)'으로 부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일본이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주8 목판을 달라고 조선 조정에 억지 부리며 요청했을 때, 세종은 1424년(세종 6) '팔만대장경판' 대신 이 '주화엄경판'을 일본 사신에게 주어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일본은 해인사에 있는 고려재조대장경판을 일본으로 가져가려는 욕구가 매우 강렬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유교 국가였지만 전통적인 불교 문화재를 소중히 여겼고 그로 인해 고려대장경판은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 송나라에서 판각된 주화엄경판은 고려시대까지 잘 보존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세종 때 선린 주9의 측면에서 이 주화엄경판이 일본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주화엄경판은 불경 목판을 통해 한(韓) · 중(中) · 일(日) 삼국이 문화적으로 교류한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나아가 이 주화엄경판은 한 · 중 · 일 삼국의 문화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하는 그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한국문화재보호협회, 『문화재대관-전적-』(1986)
천혜봉 · 박상국, 『동산문화재지정조사보고서(動産文化財指定調査報告書)』(문화재관리국, 1989 · 1991 · 1992)
남권희, 『고려시대 기록문화 연구』(청주고인쇄박물관, 1994)

논문

김성주 「『화엄경』 권제35의 성격과 명칭」(『국제언어문학』 16, 2007)

인터넷 자료

국가기록유산(www.memorykorea.go.kr)
문화재청(www.cha.go.kr)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주석
주1

중국 당나라의 승려(738~839). 속성은 하후(夏候). 존칭은 청량 대사(淸涼大師)ㆍ화엄 보살. 화엄종의 제4대조로, 법장(法藏)의 화엄 교학을 부흥하였다. 저서에 ≪화엄경소≫ 60권, ≪수소연의초(隨疏演義鈔)≫ 90권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2

중국 당나라 고종의 황후(624?~705). 성은 무(武). 이름은 조(曌). 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여제(女帝)로 고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쥐고, 두 아들을 차례로 제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으며,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성신 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우리말샘

주3

중국에서 활약한 북인도 출신의 승려(359~429). 구마라습(鳩摩羅什), 혜원(慧遠), 법현(法顯) 등과 친교를 맺었고, 경전을 번역하는 사람으로 유명하였다. 한역(漢譯) ≪화엄경≫ 60권이 있다. 우리말샘

주4

한 질로 된 책의 전부. 우리말샘

주5

두루마리식으로 길게 이은 종이를 옆으로 적당한 폭으로 병풍처럼 접고, 그 앞과 뒤에 따로 표지를 붙인, 책의 겉모양을 꾸미는 방법의 하나. 우리말샘

주6

검은 줄을 친 종이. 예전에 중국에서 염서(艷書)를 쓰는 데 썼다. 우리말샘

주7

가야성(迦耶城)에서 도를 이룬 부처가 세상에 나온 본뜻을 말한 경전. 모든 불교 경전 가운데 가장 존귀하게 여겨지는 경전이다. 쿠마라지바가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8권 28품. 우리말샘

주8

팔만대장경

주9

이웃 나라와 친선을 꾀하기 위하여 취하는 외교 정책.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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