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릉 ()

고려시대사
유적
북한 개성특별시에 있는 고려 전기 제17대 국왕 인종의 비인 공예태후 임씨의 능.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1183년(명종 13)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공예태후
소재지
개성특별시 인근(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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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순릉(純陵)은 북한 개성특별시에 있는 고려 전기 제17대 국왕 인종의 비인 공예태후 임씨의 능이다. 인종의 사후 장남인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태후로 존칭하였고, 1183년(명종 13)에 사망하면서 공예태후로 시호를 올리고 순릉에 안장하였다. 순릉을 수호하는 산직장상은 4명을 두어 수호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관리 소홀로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편인 인종의 장릉 주변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의
북한 개성특별시에 있는 고려 전기 제17대 국왕 인종의 비인 공예태후 임씨의 능.
건립경위

공예태후(恭睿太后, 1109~1183) 임씨는 인종의 왕비로서 의종(毅宗) · 명종(明宗) · 신종(神宗)의 모후이다. 1126년(인종 4) 6월 20일 인종과 혼인하여 연덕궁주(延德宮主)로 불렸다.

1127년(인종 5) 4월 11일에 장남인 의종을 출산하였고, 1129년(인종 7) 5월 10일 왕비로 책봉되었다. 1131년(인종 9) 10월 17일에 명종을 낳았고, 1144년(인종 22)에 신종을 낳았다. 1146년 의종이 즉위하고 모후를 왕태후로 존칭하였다. 1183년(명종 13년) 11월 계미일에 세상을 떠나 공예태후로 시호를 올렸고, 같은 달 11일에 순릉(純陵)에 안장하였다.

변천

1183년 공예왕후를 순릉에 안장하였고, 1184년 금나라에서 조문을 보내왔다. 왕후의 진전사원(眞殿寺院)은 인종과 더불어 경기도 장단군 오관산 아래, 영북면 현화리 영통동에 있는 영통사(靈通寺)이다. 고려시대에 왕릉의 관리는 제릉서(諸陵署)를 설치하여 담당하였다.

인종 대에는 왕릉이나 왕후릉을 수호하기 위해 산직장상(散職將相)이라는 위숙군(圍宿軍)을 두어 능을 수호하도록 하였다. 위숙군의 숫자는 능마다 달랐는데, 공예태후의 순릉은 산직장상 4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17년(고종 4) 3월 기미일에 순릉이 도적떼에 의해서 파헤쳐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관리 소홀로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형태와 특징

순릉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므로 묘제나 널방의 구조 등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현재 개성특별시 남쪽에 자리해 있는 인종의 장릉(長陵) 주변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의의 및 평가

고려에서는 왕후나 태후에게 휘호와 함께 능호를 붙이는데, 순릉은 공예태후의 능호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장경희, 『고려왕릉(증보판)』(예맥, 2013)
김인철, 『고려왕릉연구』(사회과학출판사, 2010)
장경희, 『고려왕릉』(예맥, 2008)

논문

홍영의, 「조선시대 고려왕릉의 현황과 보존 관리 실태」(『한국중세고고학』 5, 2019)
권두규, 「고려시대 능호 기재 양식과 수여 기준」(『한국중세고고학』 창간호, 2017)
윤기엽, 「고려 혼전의 설치와 기능」(『한국사상사학』 45집, 2013)

인터넷 자료

이북오도청(https://ibuk5do.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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