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노강서원은 오강마을 후면에 나지막한 구릉을 등지고 넓은 들을 바라보며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자리하고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전면에 강당과 동서재로 이루어진 강학 공간이 있고, 그 뒤로 사당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형식이다. 강당은 향교의 명륜당과 같이 유생들이 공부하는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충남지역 서원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맞배지붕의 박공면 풍판 밑에 덧지붕 형태의 ‘영(榮)’을 설치하였다.
노강서원은 1675년에 김수항(金壽恒) 등의 발의로 윤황(尹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하여 건립되었다. 윤황(尹煌)을 주벽으로 윤선거(尹宣擧)를 봉안했으며, 1682년에 사액을 받고 윤문거(尹文擧)를, 1732년에 윤증(尹拯)을 추향하였다. 1717년 정쟁으로 인해 윤선거, 윤증 부자의 관직이 삭탈되면서 사액 현판까지 철거되었다가 1722년(경종 2) 양인의 관직 회복과 더불어 현판이 복액되었으며,1791년에 중수되었다. 노강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때 철폐되지 않는 47개 서원 중 하나로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다. 강당도 서원 창건 당시 건립되어 그 모습을 유지해오고 있다.
노강서원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지에 남서향하여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구성을 하고 있다.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당을 일축선상에 놓고 강당 전면에 동·서재가 대칭으로 자리하는 정연한 배치구성이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충남지역 뿐 아니라 현존하는 서원 강당 중에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평면은 일반적인 강당 형태와 같이 가운데 3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방이 있다. 간살의 구성에 있어서 중앙의 대청보다 양단간의 주간을 더 넓게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체로 강당에 온돌방을 들이면 대청 전면에는 창호를 생략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건물은 평면 전체에 전퇴를 두고 전면 모두에 세살분합문을 달았다. 그러나 벽체 상부가 트여 있는 것으로 보아 창호는 후대에 설치된 것으로 판단된다. 배면은 중앙 3칸에만 머름 위에 세살문을 설치하였으며 측면에는 골판문, 세살문, 판벽과 회벽을 섞어서 설치하였다. 기단은 가공이 잘된 장대석을 바른층 쌓기하여 세벌대로 조성하였고, 기단 전면에는 동서 2개의 계단이 있다. 초석은 거칠게 다듬은 방형 또는 덤벙주초이며, 그 위에 굵은 원기둥을 배흘림을 주어 높게 세웠다. 공포는 1출목 3익공의 구조이다. 초제공과 이제공은 쇠서 모양으로 살미 끝에 연화를 조각하였으며, 여기에 행공첨차를 이중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운공형의 3제공을 얹어서 보머리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3익공의 경우 2출목으로 포를 짜고, 1출목 2익공의 경우 행공첨차를 하나로 처리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건물은 절충적인 공포 구조를 하고 있다. 주간에는 창방 위에 화려하게 투각한 화반으로 장혀를 받치며 반면에 배면은 간소하게 방형 판재로 대신하였다. 지붕가구는 측면이 2고주 5량가이며 내부는 전후 평주 위에 대들보를 가로 지른 무고주 5량가이다. 대들보는 방형의 큰 부재를 자연스럽게 모를 굴려 치목하였고, 그 위에 종보와 화려한 대공이 종도리를 받친다. 전체적인 가구가 견실하고 세련된 수법을 보여준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인데, 박공면 풍판 아래에 짧은 덧지붕을 눈썹처럼 달아내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덧지붕을 가례서(家禮書)에서는 ‘영(榮)’이라 한다.
노강서원 강당은 평면 구성은 조선시대 일반적인 서원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 규모는 현존하는 서원 강당 중에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도 철폐되지 않고 원위치에서 그 모습을 유지해오고 있는 강당은 서원 건축으로서 검박하고 건실한 조형미를 바탕으로 공포와 화반 등 세부 수법에서는 장식화되는 후기적 수법을 보여준다. 특히 ‘영(榮)’을 설치한 지붕의 모습은 돈암서원 응도당과 청주향교 명륜당에서도 볼 수 있으나 보다 합리적이고 구축적인 결구수법을 보여준다.
노강서원은 돈암서원과 함께 호서지역의 대표 서원이며, 소론계 서원의 중심으로 정치, 사상, 문화적 측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강당은 서원 창건 시 건립된 것으로 후대에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으나 규모나 형태는 본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현존하는 서원 강당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하며, 규모에 맞게 부재나 가구 구조가 견실하고 안정된 구법을 보여준다. 공포와 화반, 대공 등의 세부적 수법에서는 장식화되는 조선 후기의 시대적 특성을 보여준다. 특히 '하옥(厦屋)'의 형식을 따라, 5량의 구조에 맞배지붕을 취하고, 지붕 측면에 ‘영(榮)’을 구성하고 있어 그 시대 사림들의 예제(禮制)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