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김제향교는 김제시 성산공원 남쪽에 있으며 향교의 동쪽 130m 지점에는 김제관아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김제관아에는 수령이 업무를 보는 동헌(東軒)과 수령의 살림집인 내아(內衙), 누정인 피금각(披襟閣), 관리사가 남아 있다. 그리고 김제향교에는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 · 서무, 동 · 서재, 만화루가 잘 남아 있다.
김제향교는 1404년(태종 4)에 창건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한동안 중건되지 못하다가 1635년(인조 13)에 장수향교를 참고하여 재건하였다. 명륜당은 1842년(헌종 8)과 1879년(고종 16)에 중수하였으며 한국전쟁 때 일부 파괴되어 1958년에 보수하였다. 이때 동무(東廡)도 함께 중건하였다. 만화루는 1935년에 중건한 건물이다. 동재와 서재는 1918년 당시 멸실되어 있었으나 후대에 복원하였다.
김제동헌과 내아는 1667년(현종 8)에 군수 민도(閔燾)가 세웠다고 한다. 동헌의 이름은 처음에 근민헌(近民軒)이라 했으나 1699년(숙종 25)에 중수하면서 사칠헌(事七軒)으로 바꿨다. 사칠헌이란 7가지 공무(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속)을 맡아보는 관아라는 뜻이다. 현재의 동헌은 1881년(고종 18)에 중건한 것이며 1960년대 초반까지 읍사무소로 사용되면서 개조되었던 것을 1984년에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김제관아는 본래 여러 건물들이 자리하였으나 지금은 수령이 업무를 보던 동헌과 수령의 살림집인 내아, 누정인 피금각, 관리사 등 4동이 남아 있다.
김제향교는 앞쪽에 학문을 가르치는 강학영역이 있고 그 뒤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선현(先賢)들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문묘영역이 있다. 강학영역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명륜당과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 · 서재가 있다. 문묘영역에는 대성전과 동 · 서무가 자리하고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와 사성(四聖), 송나라의 유학자 4분의 신위를 모셨으며 동무와 서무에는 우리나라의 유학자 18분의 신위를 나누어 모셨다.
김제관아는 현재 입구부분에 관리사가 있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있다. 마당의 북쪽에는 동헌이 남향하고 있으며, 서쪽에는 피금각이 동향하고 있다. 그리고 동헌 뒤에는 내아가 동향하고 있다. 동헌은 정면 7칸, 측면 4칸 건물로서 이익공(二翼工)계 팔작집이다. 서쪽에는 4칸 방을 두고 방의 동쪽에는 6칸 대청을 두었으며, 방과 대청 바깥에는 모두 마루를 시설하였다. 내아는 ‘ㄷ’자형 평면을 지니고 있다. 수령의 가족이 거처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폐쇄적인 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앙부에는 6칸 대청을 두었고 좌우 날개부에는 방과 고방, 부엌을 드렸다. 피금각은 전라도 지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정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서 중앙에 한 칸 방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둘렀다. 공포는 초익공 형식으로 제공과 첨차를 교차시켜 상부구조를 바치고 있다.
김제향교는 만화루와 명륜당, 대성전이 직선축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다른 향교들처럼 명륜당과 동 · 서재, 대성전과 동 · 서무가 마당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지 않고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전면 퇴칸(退間)를 개방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의 경우 겹처마와 이익공(二翼工)으로 꾸몄지만 배면은 홑처마와 간단한 초익공으로 처리하는 등 정면을 중요시 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물익공(勿翼工) 건물로서 평면과 외관이 특색 있다. 일반적으로 명륜당은 중앙에 대청을 두고 대청 좌우에 방이 있지만 김제향교 명륜당은 대청 좌우측에도 모두 마루를 시설하였다. 지붕의 구성도 성균관의 명륜당처럼 중앙을 높게 하고 좌우측을 낮게 구성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김제관아에는 동헌, 내아, 피금각 등 조선시대 당시의 건물이 잘 남아 있다. 조선시대 관아에 있어 동헌과 내아가 함께 남아 있는 것은 보기 드문 사료로서 학술적, 건축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김제향교는 창건시기와 중건시기가 비교적 빠른 편으로 조선시대 건물로는 대성전이 잘 남아 있다. 명륜당과 문루인 만화루, 동 · 서무, 동 · 서재 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후에 다시 세우거나 보수하였지만 지방 향교의 품격을 잘 간직하고 있다. 김제군 관아와 향교는 서로 인접하고 있어 경관이 우수하며, 조선시대 지방 행정과 교육을 담당하던 우리나라 읍치(邑治)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