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나주목 관아는 나주읍성(사적, 1990년 지정) 안에 있으며 나주향교(사적, 2007년 지정)는 나주객사의 서쪽 약 500m 지점에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나주목 관아 건물로는 객사인 금성관(보물, 2019년 지정)을 비롯하여 나주목 내아인 금학헌, 관아의 정문인 정수루 등이 있다. 나주향교는 전주향교에 버금가는 전라남도의 최대 향교로서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대성전을 비롯하여 명륜당, 동 · 서무, 동 · 서재 등 여러 건물들이 있다. 나주목 내아인 금학헌은 1986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으로 지정되었고, 관아의 정문인 정수루는 1984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나주는 고려 초기부터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고려 말에 이미 읍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읍성이 군사와 행정의 기능을 함께 담당하게 되면서 나주읍성은 1404년(태종 4)에 완성되었다. 이후 문종연간에 이르러 성을 확장하기 시작하였으며 1457년(세조 3)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파손되어 이후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다. 나주읍성은 1910년대 후반에 사대문이 모두 무너지거나 강제로 철거되었고 성벽도 크게 훼손되었다. 1993년에 남문을 복원하였고 2006년에 동문을 복원하였다.
나주객사 금성관(錦城館)은 조선 초기 목사 이유인(李有仁)이 건립하였다고 전하며, 1603년(선조 36)과 1884년(고종 21)에 중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군청사로 사용되면서 개조되었던 것을 1963년에 부분적으로 보수하였고, 1976년∼1977년에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다. 2005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동익헌 · 서익헌 · 망화루(외삼문)를 복원하였다.
내아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상량문을 볼 때 1825년(순조 25)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으며 문간채는 1892년(고종 29)에 건립된 것이다. 금학헌은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나주군수의 관사로 사용하면서 원형이 변형되었으나 최근에 복원하여 숙박체험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주관아의 정문인 정수루(正綏樓)는 2층 누각으로 1603년에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후대에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나주향교는 1398년(태조 7)에 전국 지방 군현에 향교를 건립할 때 함께 세워졌다. 나주향교는 정유재란 후 성균관을 재건할 때 모범이 되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 수차례에 걸쳐 중수되었고 여러 건물들이 세워졌다. 1958년에 계성사, 사마재, 충복사, 수복청 등이 훼철되었으며 최근에 동 · 서무와 외삼문 등을 복원하였다.
나주는 고려 초기부터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으며, 전라도에서는 전주부 다음으로 가장 큰 도시였다. 이에 따라 나주에는 읍치의 규모에 맞게 관아와 향교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거의 훼철되었다. 조선시대 건물로는 객사 정청과 내아, 정문만 남아 있다. 이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이후 관공서와 관사 등으로 사용되면서 개조되었지만 최근 고증을 거쳐 여러 건물들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나주향교는 평지에 건립된 향교로서 문묘영역이 앞쪽에 자리하고 강학영역이 뒤쪽에 배치된 전형적인 전묘후학의 배치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 · 서무, 동 · 서재, 내신문, 외신문, 교직사 등이 남아 있다. 문묘영역은 외신문과 내신문을 차례로 거쳐 진입하도록 되어 있다. 내신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다. 대성전은 남향하고 있으며 마당을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가 마주하고 있다. 강학영역은 문묘영역에서 일각문을 통해 진입이 가능하지만 동쪽에 별도의 삼문(三門)이 있어 문묘영역과 구분되어 있다. 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이 남향하고 있고 동재와 서재가 약간 비스듬히 마주하고 있다. 명륜당의 동쪽에는 연지(蓮池)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향교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그리고 강학 영역의 동쪽에는 교직사와 비석군, 충효관과 보전각이 담장으로 구분되어 별도의 영역을 이루고 있다.
금성관은 정청이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집이다. 일반적으로 객사 정청은 정면이 3칸이고 지붕도 맞배지붕임을 감안할 때 금성관은 규모가 크고 지붕의 모습도 특색 있다. 동헌에는 현재 내아만 남아 있으며 내아는 본채와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ㄷ’자형 평면의 팔작집이다. 중앙부는 5칸인데 방 2칸과 대청 3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좌우 날개부에는 방과 부엌을 드렸다. 아문(衙門)인 정수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이다.
나주향교는 평지향교로서 전묘후학의 배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국의 지방 향교 중에서도 나주향교 대성전과 명륜당은 건축물이 장대하고 품격이 있다. 서울의 성균관과 비교할 때 규모와 세부 수법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외관과 평면 형식이 거의 유사하다. 특히,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집으로 지방 향교들보다 규모가 크다. 그리고 건물 앞에 2중 기단 및 월대가 있는 것, 연화문이 새겨진 초석을 사용한 것, 출목이 있는 주심포를 사용한 것 등은 전국의 다른 향교들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나주목 관아와 향교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이 변화되었지만 객사, 동헌, 읍성, 향교 등이 남아 있다. 여러 건물들은 비교적 옛 경관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지방 행정과 교육을 담당하는 읍치의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어 국가유산의 가치가 높다. 특히 나주향교 대성전과 명륜당, 나주객사 금성관 등은 웅장하면서도 뛰어난 건축수법을 지니고 있으며 건축형식도 특색 있는 등 역사적 ·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