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5판, 165면, 1979년 고려원에서 나왔다. 「잠자는 돌」, 「요즈음의 날씨」, 「風里의 바람」, 「그날의 病棟」, 「道峰에 살면서」 등 122편의 시와 시집 뒤쪽에 문학평론가 김재홍(金載洪)의 해설 ‘비극적(悲劇的) 세계관(世界觀)과 부활의지(復活意志)’가 실려 있다.
1979년 고려원에서 출간된 박정만의 첫 시집으로 비극적 세계관과 함께 이로부터 탈출하려는 부활 의지를 담은 시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시집은 1968년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시단에 등장한 이후 인간애에 바탕한 무구한 서정 정신과 알콜에 침윤되지 않은 건강한 시정신을 집약한 첫시집이다. 이 시집을 통해 박정만은 개인 정서 일변도의 기존의 순수 서정시에서 벗어나 허위와 모순의 세계를 부정하면서 자아의 분리를 시도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분분한 낙하 속에서/ 눈뜨는 하나의 나무/ 눈을 뜨는 풀꽃들의/ 건강한 죽음의/ 소생을 듣는다./ 무수히 작은/ 아이들의 손뼉소리가 사무쳐 있는/ 암흑의 깊은/ 땅속에서/ 몸살난 회충들은 얼마나 앓고 있는가./ 사방에 사유의 충치를 거느리고/ 밋밋한 수해를 건너 오는/ 찬란한 아침 광선./ 수태한 여자의 방문앞에서/ 나는,/ 청솔과 반짝이는 동전 몇잎을/ 흔들며/ 자꾸만 서성대고 있다.”(-「겨울 속의 봄이야기」)”에서 보이듯, 단순한 자연 찬미의 순수 서정보다 부단하게 사회적 메시지를 함축하려는 시도를 읽을 수 있다.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작이기도 한 이 시에서 화자는 ‘겨울’을 시대의 풍경으로 상징화하면서, 겨울의 매서운 손매듭을 풀면서 ‘눈뜨는 하나의 나무/ 눈을 뜨는 풀꽃들의/ 건강한 죽음의/ 소생을 듣는다’는 구절에 보이듯 시대고를 이기고 일어서는 민초들의 소생 의지를 환기시킨다.
박정만의 초기시들은 그를 둘러싼 세계를 비극적으로 인식하는 한편, 그 같은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이를 초극하려는 의지를 내면화하고 있다. “가시풀 지천으로 흐드러진 이승의/ 단근질 세월에 두 눈이 멀고/ 뿌리 없는 어금니로 어둠을 짚어가며/
마릉마다 떠다니는 슬픈 귀동냥./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데/ 반벙어리 가슴으로 바다를 보면/ 밤눈도 눈에 들어 꽃처럼 지고/ 하늘 위의 하늘의 초록별도 이슥하여라.// 내 손을 잡아다오,/ 눈부신 그대 살결도 정다운 목소리도/ 해와 함께 저물어서/ 머나먼 놀빛 숯이 되는 곳.”(-「잠자는 돌」 부분)에서 보이듯, 화자는 그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가시풀’, ‘단근질’, ‘반벙어리 가슴’ 등의 상징 시어를 통하여 억압과 불통으로 일관된 현실을 암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서 그치지 않고 ‘머나먼 놀빛 숯이 되는 곳’이라는 구절을 통해 그 안에 내재된 힘과 탈출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 잠자는 돌처럼 눕고 싶다던 박정만은 그의 시 「작은 연가」에서는 바람도 풀도 땅에 누워버린 그 마지막 어둠 속에서도 꽃초롱 하나 불 밝히며 사랑을 부여안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같은 사유의 구조는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에 일관되어 있다. 가령 “주여, 우리들 각자에게/ 그의 실로 짜는 영혼의 방과/ 비단 같은 죽음을 내려주소서./ 어두운 영혼의 밀실에 돌아와/ 육신의 때를 벗어버리는 지고의 화신(化身),/ 나에게 한 쌍의 날개를 주시든가.”(-「누에의 잠」 부분)에 보이듯, 화자는 누에의 은유를 빌어 ‘죽음’과 ‘육신의 때를 벗어버리는 지고의 화신’이라는 이중구조를 형상화하고 있다. 서정적 수사와 함께 구사된 이 같은 재생 구조는 감상(感傷)을 넘어 생동하는 재생 모티브를 구축하고 있다.
시집 『잠자는 돌』을 통하여 박정만은 그가 몸담고 있는 당대의 현실을 명징한 서정적 시어로 규명해내는 한편,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내면적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집은 이른바 접신화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시인의 말에 보이듯, 1981년 이른바 ‘한수산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군사정권의 고문을 받은 이후 하룻밤에 30여 편의 시를 쓰기 이전에 안정된 정신세계를 견지하고 있을 때의 소산이다. 탄탄한 서정성을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 어두운 현실에서 비롯된 허무 의식에서 벗어나 새롭게 서고자 하는 초극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김재홍은 『잠자는 돌』의 시세계를 가리켜, 박정만의 시세계를 소멸하는 세계에 대한 응시와 천착의 시정신으로 규정한다. 이를 근거로 박정만의 작품 체계는 소멸과 애한을 바탕으로 하는 표층구조와 순결의 생명력과 부활 의지라는 심층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서정과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내면적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는 박정만은 최근 들어 소월에서부터 한용운, 정지용, 김영랑, 박목월, 신석정 등 한국 서정시의 맥을 잇는 서정시인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