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6판, 121면, 197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되었다. ‘켄터키의 집’, ‘동두천(東豆川)’, ‘고산행(高山行)’, ‘영동행각(嶺東行脚)’, ‘부활’ 등 5부로 나누어, 「동두천」연작 9편, 「안개」, 「아우시비쯔」, 「베트남 Ⅰ」등 50편의 시들을 수록하고 있다. 권말에 문학평론가 김치수(金治洙)의 해설 ‘인식(認識)과 탐구(探究)의 시학(詩學)‘이 실려 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9번째로 출간된 시집으로 동두천 일대 미군부대 기지촌 문제를 소재로 한 9편의 「동두천」 연작이 주목을 끈다. 이 작품을 통해 본격적으로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에 대한 시적 해명을 시도하여 시단 내외의 주목을 끌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출항제」가 당선되어 시단에 나와, ‘반시’ 동인으로 참여한 바 있는 김명인의 첫 시집이다. 저자가 교사 생활을 했던 동두천 일대의 미군 기지촌 주변에서 벌어진 일들을 소재로 하여 씌어진 시들이 대부분이다. 냉전과 산업화 시대에 즈음한 미군 부대 주변 하층민들의 삶을 시적으로 투영함으로써, 당대 민초들의 고통을 시를 통해 보여주는 한편 민중들의 삶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담고 있다.
김명인은 위의 시「동두천」에서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던 전쟁으로 인하여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생겨난 혼혈아의 아픔을 시적 화자가 살아온 내력과 연결하면서 또 다른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다. 남북으로 분단되어 벌어진 전쟁 상황과 그 후유증에서 발생될 수밖에 없었던 혼혈아의 유일한 희망은 부유한 아버지의 나라, 미국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희망은 “더러운 그리움”만 뒤로한 채 현실의 “배고픈 고향”에 남겨질 뿐이다. 김명인의 유년의 그리움과 혼혈아의 그리움은 시간과 공간만 다를 뿐, 혼혈아인 그들도 그 자신의 유년과 같이,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고 있는 것이다. 유년의 허기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나’를 고아원에 맡기고 떠나가 버린 기약 없는 기다림 위에 “더러운 그리움”으로 덧입혀진다. 물론 “더러운 그리움”이 갖는 표면적인 의미는, ‘백의민족’ 또는 ‘단일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만들어낸 민족적 순혈주의에 비추어볼 때 미군의 피가 섞여 있다는 뜻에서 ‘더러움’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아처럼 남겨진 혼혈아로서 부유한 아버지의 나라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는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뜻이지만, 그 이면에는 남북 분단으로 인해 이념의 순혈주의를 강조하던 시대적 강박이 깊게 스며 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다. 그러므로 “더러운 그리움”은 개인적 차원의 정서적 그리움만이 아니라, 한국 전쟁 및 좌우 이념 대립에서 파생된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로서 한 시대가 호명하는 “더러운 그리움”으로 승화될 수 있다.
이 시집은 한국 속의 미군과 기지촌 문제를 최초로 본격적으로 조명한 시집이다.
영동의 우람한 땅과 동해의 끝없는 창랑(滄浪), 그리고 약소민족의 설움이 기본 모티프가 되고 있는 그의 시는 이러한 비애와 비극이 고도의 감수성으로 용해되어 우리 자신의 삶의 아픔과 슬픔, 그것을 이겨내려는 의지와 열망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집은 그의 정열의 첫 결실이다.
김현은「동두천」연작시를 관류하는 것은 아름다운 나라 미국이 후진국에 남긴 상처에 대한 자각이며, 혼혈아의 아픔은 결국 우리의 아픔이라는 고아의식으로 귀결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김명인 시의 고아의식에서 혼혈아, 즉 고아는 미국의 상처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상처로 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