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소치허련의 손자이자 미산허형의 넷째 아들이다.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에 연속으로 입선하였지만 26세에 요절하였다.
‘호남 남종화의 실질적 종조(宗祖)’라 일컬어지는 소치(小癡)허련(許鍊)의 손자이자, 역시 화가로 일생을 보낸 미산(米山)허형(許瀅)의 넷째 아들로 1917년 전라남도 강진 병영(兵營)에서 태어났다. 근현대 목포 화단의 대부로 평가되는 남농(南農)허건(許楗)은 그의 셋째 형이다. 뛰어난 그림솜씨를 타고나 허형의 총애를 받았고 허건과의 우애도 깊었다. 임인(林人)이라는 호로 알려졌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철만(鐵巒)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강진 병영에서 목포로 일가가 이사한 후 목포 북교보통학교를 마치고 목포상업고등학교(현 전남제일고등학교)의 전신인 목포상업전수학교에 진학하였다. 1935년 19세의 나이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첫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이후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의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 출품하여 입선하였다. 그림 공부를 위해 일본에 가려했으나 아버지 허형이 극구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38년 허형이 돌아가자 삼년상을 치른 뒤 허건의 지원에 힘입어 1940년 일본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에 입학하였다. 1941년 일본 문부성미술전람회에 목포 유달산 부근의 풍경을 그린 「전가(田家)」를 출품하여 입선한 후, 광주에서 동강(東岡)정운면(鄭雲葂)과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42년의 문부성전람회에 다시 입선하여 각 신문에 “반도화단의 신성(新星)”이라 크게 보도되는 등, 천재성을 전국에 떨쳤지만 허약한 체질에 더해진 과로로 인하여 그해 10월 15일 향년 25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전통적인 방식의 그림 제작 방식 보다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채색과 표현을 할 것을 주장하고 작품 활동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일본화풍의 영향을 받은 사생적 채색화였다.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화가로서의 활동기간은 8년 여에 그쳤지만 문부성전람회 연속 입선, 조선미술전람회 5회 입선이라는 강렬한 족적을 남겼으며 특히 허건의 초기작에 그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 5회 입선(1935, 1936, 1938, 1939, 1940년)
문부성전람회 2회 입선(1941, 1942년)
개인전 1회(1941년, 광주에서 정운면과 2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