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행면 ()

회화
인물
일제강점기 「하」, 「자원개발」 등을 그린 화가.
이칭
이칭
목재(木齋), 당호(堂號), 적취산장(積翠山莊)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6년(고종 43)
사망 연도
1966년
본관
양천(陽川)
출생지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쌍정리
관련 사건
조선미술전람회|1957년 전라남도 문화상 미술부문 수상
정의
일제강점기 「하」, 「자원개발」 등을 그린 화가.
개설

본관은 양천(陽川), 호는 목재(木齋)이다. 전라남도 진도에서 태어났으며,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의 동생이다. 미산(米山) 허형(許瀅)과 허백련에게서 그림을 배운 후, 1924년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38년에 창립된 허백련의 연진회(鍊眞會) 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39년, 1942년에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였다. 1956년을 전후하여 ‘적취산장(積翠山莊)’ 당호를 사용하였고, 사망할 때까지 광주에서 작품 활동과 후진양성을 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6년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쌍정리에서 허경언(許京彦)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큰형이 허백련이다. 어렸을 때 서당과 부친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집안 어른인 허형에게 서예와 사군자 등을 배웠다. 1924년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가 3학년 때에 중퇴하였다. 진도군청 서기, 전남도청 등에 근무하다 1941년에 금광채굴과 제지사업을 위하여 관직을 그만두었다. 1939년에 허백련을 중심으로 한 동양화 연구단체인 연진회(鍊眞會)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고, 사망할 때까지 주요 멤버로 활동 하였다.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1939)와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1942)에 각각 「하(霞)」와 「자원개발(資源開發)」을 출품하여 입선했다. 36세 때인 1942년에 순천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하는 등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제지회사를 창업하여 화선지 개발을 시도하였으나 경영에 실패하였다. 1956년 광주에서 개최한 제2회 개인전의 성공으로 거처이자 화실인 ‘적취산장(積翠山莊)’을 광주에 마련한 후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57년 전주, 1959년 서울과 광주, 1960년 제주, 1961년 부산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그의 작품 세계는 광주에 화실(적취산장)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던 시기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전기는 사의적(寫意的) 관념산수(觀念山水)를 그렸던 허백련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시기로, 미점(米點)과 삼원법(三遠法)을 구사한 작품을 남겼다. 후기 작품의 특징은 몰골법(沒骨法)을 효과적으로 구사한 사실적인 화면과 화려한 채색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57년 전라남도 문화상 미술부문을 수상하였고, 1966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 2회 입선(1939, 1942년)

1957년 전라남도 문화상 미술부문 수상

참고문헌

「목재 허행면의 생애와 예술」(백계철, 조선대학교 대학원 순수미술학과 석사학위논문, 1987)
「조선시대 호남의 전통회화」(이태호, 『호남의 전통회화』, 국립광주박물관, 1984)
집필자
김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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