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대곡사 삼화상·조사 진영 ( · )

의성 대곡사 삼화상 진영
의성 대곡사 삼화상 진영
회화
작품
문화재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 소재 대곡사에 있는 삼화상 및 조사 진영.
이칭
이칭
삼화상진영, 청허당휴정진영, 사명당유정진영, 포허당담수진영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경상북도
종목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2010년 11월 11일 지정)
소재지
다인면 봉정리 894
정의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 소재 대곡사에 있는 삼화상 및 조사 진영.
구성 및 형식

대곡사 삼화상(三和尙) 진영과 청허당 휴정(淸虛堂休靜), 사명당 유정(泗溟堂惟政) , 포허당 담수(抱虛堂曇秀)은 모두 18세기 후반 진영이다. 이 가운데 삼화상 진영은 가로가 긴 화면에 지공화상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옹화상과 무학화상을 1폭에 나눠 나란히 병렬로 구성하였으며, 모두 의자에 가부좌상 형식으로 그렸다.

각각 1폭씩 모두 3폭에 나눠 독존 형식으로 구성된 휴정 진영과 유정 진영은 병풍을 배경으로 방형의 선상 위에 앉아 전신 측면향에 좌안과 우안 칠분상으로, 담수 진영은 우안 칠분상으로 그려졌다.

내용

대곡사에 봉안된 삼화상 진영의 인물은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등의 3대 화상(三大和尙)을 말한다. 이들은 고려 말에 활약했던 선승(禪僧)으로, 지공은 나옹에게 의발(衣鉢)과 발우(鉢盂)를 전해주고 나옹은 무학에게 의발을 전하여 사자 상승(師資相承)의 관계를 이루었다.

지공은 호승(胡僧)으로서 충숙왕대(忠肅王代)에 고려에 들어와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그 후 원(元)에 들어가 고려인이 지어준 법원사(法源寺)에 머무르면서 많은 고려 승려들을 지도하였다.

나옹은 영해인(寧海人)아씨(牙氏)로서, 20세에 출가한 후 회암사(檜嚴寺)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고 원에 들어가 지공을 뵙고 계합(契合)하였다. 지공의 법을 받고, 귀국한 후에는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었다.

무학은 삼기인(三岐人) 박씨(朴氏)이다. 18세에 출가한 후, 공민왕 때 원에 건너가 지공과 나옹을 만나 법률을 받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나옹으로부터 불자(佛子)와 의발을 전해 받았으며, 고려 말기에는 왕사 등의 자리를 사양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자,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가 되어 그를 도와 개국의 공을 세웠다.

고려 말기의 개혁파로 알려진 이들 삼화상(三和尙)은 조선시대 조사 신앙(祖師信仰)의 대상이 되어 전국 사찰에 진영이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곡사에는「대곡사창건 전후사적기(大谷寺創建前後事蹟記)」에 “이 절을 처음 창건한 시기는 신라 때라고 하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알 수가 없다. 중간에 고려 말 공민왕 때 서천(西天)의 지공, 즉 박타존자(薄陀尊者)가 중국에 이르러 나옹에게 불법을 전수한 후에 나옹과 함께 이곳에 와서 주변을 살피고는 절을 지었다.”라고 한 까닭에 지공, 나옹, 무학의 삼화상 진영을 대곡사에 모신 것으로 보인다.

서산대사로 잘 알려진 휴정은 제자 사명당 유정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승군을 조직하여 왜적을 격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휴정은 억불 정책에 있던 조선시대 불교의 법맥을 중흥시킨 고승이었다. 선조는 휴정에게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總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의 작위를 내렸다.

사명당은 임진왜란 때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평양성 탈환 작전과 서울 부근의 노원평과 우관동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사명당은 왜적을 물리치는데 고운사와 금성면의 수정사를 승군 기지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현황

대곡사 삼화상과 조사 진영은 모두 비단에다 채색한 것이다. 삼화상 진영은 가로 121.7㎝ 세로 241.4㎝ 규모의 화폭에 꽃비가 내리는 배경을 뒤로하여 중앙에는 보관을 쓴 지공선사가 정면으로 앉아 있다. 그 좌우에 나옹화상과 무학대사 를 각각 그렸는데, 나옹화상은 오른쪽을 향하도록 배치하였고 무학대사는 왼쪽을 향하도록 배치하였다. 세 분 모두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며, 등받이에는 청녹색 법피가 걸쳐 있다.

지공과 나옹의 의자 좌우의 끝 부분은 금빛 문양에 용머리 장식으로 마무리하였는데 비해 무학대사는 연꽃 봉오리로 장식하여 구분하였다. 세 선사의 앞에는 경상(經床)과 그 위에 벼루와 붓, 부채 등이 놓여져 있다. 세 선사는 모두 불자(拂子)를 들었는데, 지공과 무학이 든 불구의 끝은 용머리가 장식된데 비해 나옹이 든 불구는 손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지공과 무학의 오른손은 각각 크고 작은 염주를, 나옹의 오른손은 책장을 넘기는 듯한 모습으로 그렸다. 지공의 오른쪽 위에 세로로 '서천국 조사 지공 대화상 진영(西天國祖師指公大和尙眞影)'이라 썼고, 나옹이 앉은 왼쪽 위에 '공민왕사 나옹 대화상 진영(恭愍王師懶翁大和尙眞影)'이라 썼으며, 무학이 앉은 오른쪽 위에 '태조왕사 무학 대화상 진영(太祖王師無學大和尙眞影)'이라 썼다.

청허당 휴정 진영은 비단에 채색한 것으로 가로 115.9㎝ 세로 87.1㎝ 크기의 화폭에 휴정 선사를 그렸다. 배경으로는 팔곡 병풍과 상단 좌우 가장자리에 풍대를 그려 넣었고, 하단 중앙에는 붉은 란을 마련하여 화기를 적었다. 이 화기에 의해 제작 연대가 1782년(정조 6)임을 알 수 있다.

사명당 유정 진영 역시 비단에 채색한 것으로 가로 115.8㎝, 세로 82.3㎝ 크기이다. 팔곡 병풍을 배경으로 상단 좌우에 풍대가 그려졌으며 화문석 바닥 위에 방형의 선상이 놓여져 있다. 그 위에 중앙을 향한 우안 칠분면상으로 사명당 선사를 그렸는데, 한 손으로는 용머리로 장식된 불자를 쥐고 있다. 하단 중앙의 붉은 란을 마련하여 화기를 적었으며, 이 화기에 따라 제작 연대가 1782년(정조 6)임을 알 수 있다.

포허당 담수 진영은 비단에 채색하였으며 가로 105.5㎝, 세로 71.6㎝ 크기이다. 주인공인 담수 대선사는 바닥에 등받이 의자를 배경으로 바닥에 가부좌상으로 앉은 모습이다. 이 진영은 1793년(정조 16)에 문경 대승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불산화파(四佛山畵派)의 대표적인 화승인 퇴운당(退雲堂) 신겸(信謙)이 그렸다.

삼화상 진영과 청허당 휴정 진영, 사명당 유정 진영 등은 1782년(정조 5)에 같은 화원,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으며 특징적인 도상의 화풍이 비슷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특히 지공·나옹·무학의 삼화상은 1폭에 세 인물을 모두 그린 것으로, 1폭으로 된 삼화상 진영 중에서는 제작시기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꼽힌다. 포허당 담수 진영은 1793년(정조 16)에 당시 유명한 화승(畵僧)이었던 신겸(信謙)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사실적인 얼굴 묘사 등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이처럼 대곡사의 삼화상·조사 진영은 제작 연대가 빠른 사례에 속하는 진영으로 작품의 품격도 우수하다.

의의와 평가

삼화상 진영과 청허당 휴정, 사명당 유정 , 포허당 담수 등 4폭의 진영 가운데 삼화상, 청허당, 사명당 진영 등은 1782년(정조 5)에 동일 화원에 의해 같은 시기에 제작되었으며, 화풍도 유사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특히 나옹·무학·지공의 삼화상은 1폭에 그린 도상으로는 현존 진영 중 가장 이른 예에 속하며 완성도 또한 높은 작품이다.

참고문헌

『한국의 불화』24(성보문화재연구원, 2001)
「18세기 경북 의성의 불교회화와 제작자 - 밀기(密機), 치삭(稚朔), 혜식(慧湜)의 불사(佛事)를 중심으로」(정명희, 『불교미술사학』24, 2017)
「조선시대 三和尙(지공·나옹·무학)의 위상과 추념」(황인규, 『정토학연구』 , 2017)
문화재청(www.cha.go.kr)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김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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