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불가(佛家)에는 불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승려들이 활동하였으며, 이들을 화승(畵僧)이라 불렀다. 화승에 대한 호칭은 매우 다양한데, 금어(金魚), 화사(畵師·畵士), 화원(畵員·畵圓), 용면(龍眠), 비수(毘首), 양공(良工), 채화(彩畵), 회사(繪事), 경화(敬畵) 등이 쓰였다. 화승 가운데 우두머리인 수화승(首畵僧)은 도화원(都畵員) 또는 수두(首頭)라고도 한다. 두훈은 18세기 중·후반경에 경기도를 비롯한 충청도·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화승이다. 생몰 연대, 출생지, 속명 등 구체적인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당호는 미상이며 법명(法名)은 두훈(枓訓, 枓薰, 抖薰, 斗熏)을 사용하였다.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1755년 국청사 감로왕도(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를 비롯하여 현존 마지막 작품으로 파악되는 1775년의 통도사 영산전 석가팔상도 등에 이르기까지 10여 점의 불화가 남아 있다. 이외에도 1759년에는 통도사 불사에 단청화원(丹靑畵員)으로 참여하였고, 1771년 직지사 불상 개금 불사에 동참하는 등 불화는 물론 단청, 불상 개금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활동하였다.
화승 두훈의 생몰년은 미상이지만 그의 행적은 1755년 국청사 감로왕도를 비롯하여 1775년의 통도사 영산전 석가팔상도 등에 이르기까지 현존 불화 10여 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두훈은 경기도 광주 국청사 감로왕도를 제작한 수화승 휴봉(携鳳)의 제자로서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까지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활동한 화승이다. 같은 문하생이었던 성총(性聰)과 함께 오랫동안 활약하였고, 1760년대 후반에 이르면 한 화파(畵派)를 이끌었을 정도의 역량을 지닌 화승으로 성장하여 법주사, 통도사의 괘불을 조성하였다. 특히 통도사와는 1759년부터 1775년까지 몇 차례 불사를 주도했을 정도로 깊은 인연을 맺고 활동하였다.
두훈의 가장 이른 시기의 불화는 1755년 수화승 휴봉(携鳳) 밑에서 재토(再土), 성총(性聰), 재성(再性)과 고성 건봉사에서 감로왕도를 제작하여 광주 국청사에 봉안한 것이다. 1759년에는 통도사의 「기유년개금탱화단확사시주기(己酉年改金幀畵丹雘事施主記)」에 단청화원(丹靑畵員)으로 기록되어 있고, 1764년에는 장육사 대웅전 석가모니불도와 지장도를 그렸다. 그리고 수화승 성총과 함께 1765년 청도 대적사 신중도를 제작하였다.
두훈은 1766년 법주사 괘불도와 1767년 통도사 괘불도 두 점을 연달아 남겼다. 불화 중 최고의 기량을 필요로 한 괘불을 연속으로 그린 사실로 보아 1760년대에는 두훈이 화승으로서 상당히 인정받았고 휴봉 휘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화파를 형성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 괘불에 참여했던 화승은 두훈을 비롯하여 광함(廣瑊), 윤행(允幸) 등 14인이고, 통도사 불화를 제작한 사람은 두훈, 성징(性澄), 열행(悅行) 등 14인이다. 두 작품은 모두 독존형의 괘불로 구성과 색감, 각종 문양의 배치 등이 유사하다. 범자문(梵字紋)으로 구획된 화면에 묘사된 석가모니불은 모란꽃으로 장식한 신광(身光)을 배경으로 하였다. 상의의 둥근 원문, 녹색 소매부의 방형문, 흰 바탕의 칠보문 등의 문양 배치와 조합은 두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후 1771년 2월에 경상북도 선산 수다사 시왕도와 수다사 사자도를 조성하였다. 오랜 지기인 성총과 함께 작업하였고, 교원(敎願), 윤행(允幸), 정민(定敏) 등 17인과 화폭을 나누어 그렸다. 또한 같은 해인 1771년에 직지사의 불상 개금에 참여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직지사불상개금시주질(直指寺佛像改金施主秩)」(1771)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