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동산리 동안은 경상남도 진주시 동산리 지역의 주민들이 1606년(선조 39)부터 기록해 왔던 동안으로, 2012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경상남도 진주시의 동산리에는 대대로 10개 가문이 어울려 살면서 1606년(선조 39) 이후로 동안을 작성해 왔는데, 현존하는 것은 1772년(영조 48)에 화재로 인해 소실된 후 1779년(정조 3)에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중수한 이후의 기록들이다. 여기에다 1960년까지 시대마다 짤막한 기록을 남겨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606년(선조 39)부터 1732년(영조 8)까지 약 40여 차례에 걸쳐 입록되었던 동안이 1772년(영조 48)에 화재로 인해 소실되자,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이때까지의 기록을 복원하여 1779년(정조 3)과 1797년(정조 21)에 복원한 뒤, 입록을 다시 하지는 않고 각 가문의 족보를 동안과 함께 보관하면서 1960년에 이르기까지 동안에 짤막짤막한 기록을 계속 남기고 있다.
『중수구동안(重修舊洞案)』(건륭 44년 기해(1779년)은 32×36cm, 『동안(洞案)』(정사〔1797년〕정월)은 32×36cm, 『경임동안(經任洞案)』(계축〔1913년〕중수)은 23.5×31cm, 『중수구동안(重修舊洞案)』(갑자〔1924년〕)은 28×26cm, 『중수구동안(重修舊洞案)』(1960년)은 24×25cm의 저지(楮紙)에 오침선장(五針線裝)으로 편철되어 있으며 모두 필사본이다.
『중수구동안』은 만력 34년(1606)을 시초로 만력 42년(1614), 천계 ○년 (16211627), 숭정 원년(1628), 숭정 7년(1634), 숭정 10년(1637), 숭정 11년(1638), 신사(1641), 갑신(1644), 을유(1645) 정해(1647) 기축(1649) 경인(1650) 임진(1652) 정유(1657) 무술(1658) 기해(1659) 임인(1662) 계묘(1663) 을사(1665) 기유(1669) 병진(1674) 경신(1680) 계해(1683) 기유(1669) 계축(1673) 병자(1696) 등 30여 차례에 걸쳐 인물이 입록되어 있다. 이 동안은 동계(洞契) 또는 동약(洞約)을 주도하던 수임(首任)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1772년(임진)에 화재를 만났다. 그래서 1779년(정조 3) 이의(李嶬), 박경윤(朴慶胤, 17541807) 등이 남아 있는 자료를 근거로 다시 복구하였다고 한다.
『동안』은 앞의 자료를 이어 을유(1705) 병술(1706) 기축(1709) 갑오(1714) 을미(1715) 신축(1721) 임인(1722) 갑진(1724) 병오(1726) 무신(1728) 신해(1731) 임자(1732) 등 12차례에 걸쳐 작성된 동안이 합록된 것이다. 1732년 입록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새로운 인물의 입록은 보이지 않는다.
『경임동안』은 동계 또는 동안을 주도하던 임원의 명단으로서, 1817년(순조 17)부터 1887년(고종 24)까지 임원이 수록되어 있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3년(계축) 3월 3일 유사 이필영(李弼榮) 등의 주도하에 이전의 것을 새로운 책자로 개서해서 다시 만든 것이 바로 이 『경임동안』이며, 이전의 원안은 남아 있지 않다.
『중수구동안』은 1924년에 이필영(李弼榮) 등의 주도하에 위에 언급된 『중수구동안』과 『동안』 및 『경임동안』(계축 중수)을 합쳐 하나의 책자로 작성한 것이다.
『중수구동안』은 바로 위의 1924년에 중수된 것과 내용은 같고, 1933년(계유)에도 유사 성태수(成泰琇), 성익주(成翼柱) 등에 의해 재중수되어 동안이 훼손되지 않고 온전하였기 때문에, 1960년(경자)에 이 모든 동안을 열람한 뒤 새로 중수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장암(藏巖)에 다시 넣기 전에 책자 말미에 그 사실을 간단하게 기록해 두었다.
이 동안에 입록된 인물은 대체로 곡부공씨(曲阜孔氏), 함안이씨(咸安李氏), 진양강씨(晉陽姜씨), 진양정씨공대공파(晉陽鄭氏恭戴公派), 진양정씨석정공파(晉陽鄭氏石井公派), 창녕성씨(昌寧成氏), 금산김씨(錦山金氏), 완산전씨(完山全氏), 함양박씨(咸陽朴氏), 재령이씨(載寧李氏) 등 10개 가문 출신이며, 1896년(건양 1) 이후에는 이들 10개 가문의 족보와 동안이 장암(藏巖)에 보관되어 전해왔다.
본 동안의 기록은 1779년(정조 3)과 1797년(정조 21)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는 것이지만, 1606년(선조 39) 이후 1732년(영조 8)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입록되었던 동안이 두 책에 정리된 뒤, 이를 보존하기 위하여 다시 두 차례의 추가 필사를 통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것이다.
이처럼 동안 원본이 사라지고 1779년(정조 3)과 1797년(정조 21)에 중수한 것이기는 하지만, 진주지역에서는 이처럼 오랫동안 동약 · 동계가 실시된 사례는 ‘신풍리동약(新豊里洞約)’ 이외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조선 후기 진주 향촌사회에 대한 연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자료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