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1월 1일 박용만은 덴버에서 임시회를 개최하여 6월 10일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기로 의결한 뒤, 취지서를 작성하여 북미와 하와이, 그리고 러시아 한인단체들에게 대표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는 미국 덴버에서 개최되는 민주당 대통령후보 선출대회에 맞추어 비교적 배일적인 민주당 인사들에게 일본의 한국 침략의도를 폭로하여 한국이 처한 정세를 알림과 동시에 해외 한인단체가 동일한 행동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6월 예정된 애국동지대표회 개최는 7월 11일에야 개최되었다. 대표회가 지연된 것은 1908년 3월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의사의 스티븐스(Stevens) 처단사건으로 인한 한인사회의 대응준비, 러시아 대표로 위임된 이승만의 하버드대학 학위일정 때문이었다. 14일까지 개최된 대회 참석인원은 박용만·이승만 등 36~50여명으로 추산되었다. 총 3일간(일요일 휴식) 6차 회의를 통해 대표회는 의안 제출과 연설 및 토론을 거쳐 7개조의 사항을 결정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① 향후 국내외 통일기관을 조직할 것, ② 이에 대한 준비로 각지에 통신국을 설치하여 상호간에 연락할 것을 의결하였으며, 국민교육에 필요한 내외서적의 저술·번역에 관한 사항은 합의를 보지 못한 채 후일의 토의과제로 남겼다.
이 회의의 가장 큰 성과는 둔전병제에 바탕한 군사학교 설립안의 통과였다. 이를 계기로 박용만은 1909년 해외 한인 최초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