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1월 조직되었으며,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주미외교위원부 개조계획에 반대하며 이승만의 후원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1943년 1월 설립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1921년 7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의 정치적 지지세력으로 동지회(同志會)가 조직되었다.
동지회는 하와이는 물론 미 본토인 시카고·뉴욕·몬타나·디트로이트 등지에 지부가 조직되었으며, 1929년 10월에는 이승만이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나성동지회(羅城同志會)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동지회 지부는 1930년대 말까지 이렇다 할 활동은 없었다. 그 후 1941년 4월 20일 미주의 모든 항일운동단체가 참여하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를 계기로 미주한인단체의 통일연합기관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었으며, 본격적인 군사 및 외교활동을 위해 주미외교위원부가 설치되었다. 이 후 주미외교위원부(위원장 이승만)는 중경(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아 공식적인 대미외교 전담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독단적 처사로 인해 비판여론이 고조되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주미외교위원부를 개조하려 하였다. 이에 반발한 이승만과 뉴욕동지회는 1943년 1월 『북미시보(The Korean American Times)』를 발행하여 북미지역 동지회의 역량을 강화하고 이승만의 활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에 따라 1943년 1월 16일 중가주(中加州: 중부 캘리포니아주)와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동지회 주최로 각각 민중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민중대회 결과, 동지회 지부인 로스앤젤레스·중가주·남가주(南加州: 남부 캘리포니아주)·뉴욕·시카고·몬타나 등 북미지역 동지회 지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북미총회를 결성하였다.
동지회 북미총회 조직은 크게 총회·대표회·이사부 등 3부로 구성되었으며, 이 3부는 각기 행정·입법·사법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모든 행정사무를 담당하였던 총회는 총회장·부회장·서무원을 비롯하여 편집부·교육부·산업부·구제부·사교부종교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역대 회장은 이살음(李薩音)·송철·박호근·안상학 등이었다.
북미총회는 뉴욕동지회에서 북미총지부 이름으로 발행하던 『북미시보』를 기관지로 인수하는 한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주미외교위원부 개조계획을 반대하면서 이승만의 후원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이후 동지회 북미총회는 이승만 중심의 국가건설을 위한 정강과 정책을 수립하는 등 해방이후 이승만의 건국운동에 앞장 서는데 일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