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탄대(安坦大)의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본관은 안산(安山)이다. 부인은 황씨(黃氏)이다. 중종의 후궁 창빈안씨(昌嬪安氏)의 아버지이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외조부이다. 덕흥대원군의 3자가 선조(宣祖)이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안탄대는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평생 겸손하고 근신하며 살았다. 1507년(중종 2) 딸이 9세의 나이로 궁녀에 뽑혀 입궐하였다가 중종의 후궁 창빈안씨가 되었고, 외손자 덕흥대원군의 아들이 선조(宣祖)로 즉위하였다. 이렇게 지위가 높아졌음에도 안탄대는 더욱 근신하며 선조가 내려준 돈피(豚皮)와 갖옷 같은 선물을 피하며 평생 분수를 지키며 살았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에서 원종공신에 책록되어 무관 종7품 적순부위(迪順府尉)의 품계를 받았다.
효종대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추증되었다. 부인 황씨도 정경부인(貞敬夫人)에 함께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성곡동에 있으며, 부인 황씨의 무덤과 함께 있다.
선조대 그의 묘소에 돌을 세우고 수묘직(守墓職)을 두어 금벌(禁伐)하였으나, 묘역이 훼손되고 몰래 매장하는 투매자(偸埋者)가 발생하였다. 효종대 인조의 동생 능원대군(綾原大君)과 인조의 3남 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의 건의로 안탄대의 묘소를 보호하도록 하고 묘소를 봉축하였다. 또한 1656년(효종 7) 왕명으로 외손 신최(申最)가 짓고, 신승(申昇)이 글씨를 쓴 묘표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