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 미상.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선조대 내의원 의관으로 활동하였고, 특히 침평술(針砭術)에 능했다. 임진왜란 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어 한계군(韓溪君)의 봉호를 받았다.
이공기(李公沂)는 목은 이색(李穡)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이영(李泠)이며, 어머니는 흥양 김씨(興陽金氏) 김근(金瑾)의 딸이다. 부인은 직산 조씨(稷山趙氏) 조서린(趙瑞鱗)의 딸이며, 아들 한풍군(韓豊君) 이영남(李英男)도 의관이었다.
선조대 명의 허준(許浚), 『의림촬요(醫林撮要)』를 저술한 양예수(楊禮壽)와 함께 활동하며, 왕실 구성원들의 질병을 치료하였다. 이로 보아 이공기도 내의원 소속의 어의(御醫)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침을 잘 놓아 침폄술에 능했다는 당대의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때 선조와 세자를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당대 허준과 함께 명성이 높았던 의관이다.
이공기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내의원 의관으로 활동하였다. 1586년(선조 19) 중전이던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편찮게 되자, 시약청에서 10여 일 동안 근무하며 중전의 건강을 회복하게 하였다. 그 공으로 문반(文班)에 서용되었다. 당시 이러한 선조의 결정에 대해 ‘하찮은 의원이 사대부의 서열에 들어 관직이 중요해지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었으나, 선조는 그 뜻을 거두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명나라 원군이 참전한 후 부상자가 발생하자, 이공기는 명나라 군사들을 치료하였다. 1593년(선조 26) 비변사에서는 다친 명나라 군사에게 내의원 의관을 보내 치료할 것을 건의하였다. 명군은 전쟁 중 주로 칼에 찔리거나 탄환을 맞고 화상을 입었는데, 이공기가 침폄술에 능했기 때문에 차출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중에 이공기는 선조를 호종하였고, 특히 1597년(선조 30) 이명증(耳鳴症) 등으로 건강이 편하지 않았던 선조에게 양예수·허준과 함께 입시하여 침술을 행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허준과 함께 선조를 치료하며 침술을 시행하였다.
임진왜란 중 1595년(선조 28) 세자 광해군을 배종한 공로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가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1600년(선조 33) 경에 수의(首醫)로서 다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1604년(선조 37) 임진왜란 때에 한양에서 의주(義州)까지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봉되었으며, 한계군(韓溪君)에 봉해졌다. 충청북도 제천시 송학면에 영당(影堂)이 있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