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무용예술협회 ()

무용
단체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산하단체로 조직된 협회.
정의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산하단체로 조직된 협회.
설립목적

조선의 신무용을 역사의 궤도에 올려놓고 조선의 민족무용을 현대인에게 다시 꽃피우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무용공연의 질과 예술가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무용의 대중화를 위하여 초등교육과정의 의무화를 요구하는 등 무용을 사회의 주도적인 예술 장르로 세우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내용

1946년 6월 8일 위원장 조택원(趙澤元), 부위원장 함귀봉(咸貴奉), 현대무용 수석위원 최승희(崔承喜), 서기장 문철민(文哲民), 서기국장 박용호, 장추화 등으로 구성되어 조직되었다. 현대무용부, 발레부, 교육무용부, 이론부, 미술부의 5개 부문의 종합조직체로 구성되었고 5개 부처마다 수석위원과 위원을 두었다.

창립공연은 8월 5일부터 3일간 을지로 국도극장에서 18개의 작품(「원무곡」, 「봉선화」, 「산신무」, 「비단거미」, 「마음」, 「탕자의 골맥」,「약」, 「탈춤」, 「만종」, 「무고」, 「해방」, 「아리랑 회상곡」, 「산의 즐거움」, 「여명」, 「다부라의 리듬」, 「화랑」, 「지열」, 「애국가」)을 공연하였고, 마지막 「애국가」에는 출연자 200여 명 전원이 공연하였다.

1939년 개설된 선방무용연구소와 1943년에 발족된 삼화무용연구소를 산하단체로 두기도 하였으나, 창립공연을 절정으로 무명무실화되었고, 이후 멤버들은 한국무용예술의 핵심멤버로서 무용계를 주도하였다. 창립공연 후 무용가들의 생활빈곤과 이에 따른 폐쇄적인 성격에서 오는 출연자 섭외 어려움 등의 욕구불만과 역량부족, 공동체의식과 연대감의 미성숙, 의식의 후진성 그리고 조택원의 친일을 문제삼은 무용가들의 불화로 결국 협의체로서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이후 ‘한국무용예술인협회’와 ‘한국무용가협회’의 2개 단체로 운영되다가 5·16군사쿠데타 이후 하나로 통합되었다. 1961년 ‘한국무용협회’로 개칭되고, 1964년 사단법인체로 발족하여 무용예술의 발전과 무용문화교류, 무용가의 친목도모 및 권익 신장 등을 도모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무용예술협회는 해방 이후 기성무용인이 핵심이 된 한국 무대 무용인 전체를 총망라한 최초의 전국 규모 단일조직체였다. 이 단체는 주로 신무용을 귀착시켜 한국무용예술의 방향을 모색하였고 그 조직 안에 조명, 장치, 의상 등 자매예술의 참여를 꾀하였다는 점에서 구성상 체제를 잘 갖춘 조직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참고문헌

『무형문화재의 탄생』(정수진, 역사비평사, 2008)
『한국현대 예술사대계』1(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시공사, 1999)
「해방직후 춤의 전개양상과 성격 연구」(성기숙, 『한국무용연구』, Vol. 10,
집필자
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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