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삼베 바탕에 채색. 영산회도의 크기는 세로 336㎝, 가로 269㎝, 아미타불회도의 크기는 세로 316.5㎝, 가로 194㎝. 1741년에 광덕사에서 일반인들의 후원으로 제작된 불화로, 붕우(鵬友), 사혜(思惠), 축명(竺明), 인찰(印察)이 그렸다. 현재 삼세후불도 중 “영산회탱(靈山會幀)”과 “미타회탱(彌陀會幀)”이 1741년 불화이고 약사회탱은 소실되어 1991년에 다시 제작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사찰이 복구되면서 18세기에는 사찰 전각의 규모와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주불전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건립하게 됨에 따라 실내 공간이 확장되면서 불상의 봉안도 달라졌다. 즉 큰 규모의 불전 내부에 맞추어 긴 불단을 설치하게 됨에 따라 대웅보전에는 삼세불상이 모셔지게 되며 뒤편의 불벽에는 삼세후불도가 걸렸다. 18세기 전반에는 삼세후불도를 세 폭으로 나누어 조성된 예가 많이 있는데 천안 광덕사 삼세불도도 그 중 하나이다.
이 불화를 그린 붕우는 18세기 중엽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한 화승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현전 작품으로는 광덕사 삼세불도가 유일하다. 대형 사찰의 중심 전각에 봉안되었던 불화 제작에서 수화승을 담당했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영향력있는 화승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혜, 축명, 인찰은 광덕사 삼세불도 외에 천안 광덕사 괘불도(1749년)와 예산 대련사 괘불도(1750년)를 조성하였다.
영산회도는 화면의 중앙에 자리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8위의 보살과 사천왕, 10대 제자, 팔부중, 용왕과 용녀 등이 엄격하게 좌우대칭을 이루도록 배치되어 있다. 석가모니불 상단에는 구름으로 감싼 화려한 연꽃 천개가 표현되었다. 인물들은 빈 공간 없이 빽빽하게 자리하고 있지만 상단으로 갈수록 엇갈려 배치하여 딱딱한 구도의 경직성을 완화시켜 준다. 화면의 둘레는 범문(梵文)이 쓰여 있다.
통견의 법의를 입고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은 거대한 주형거신광을 등 지고 있어 시선을 집중시킨다. 상체의 비례는 적당하지만 오른팔을 유난히 크고 우람하게 그려 전체적인 균형은 맞지 않는다. 가슴에는 만(卍)자가 크게 그려져 있는데, 조선 후기의 불화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석가모니불 뒤쪽에 자리한 10대제자 중 젊은이는 볼이나 이마 부분을 둥글고 희게 바림한 반면, 노인의 얼굴에는 좀 더 자연스러운 입체감을 의도하고 채색하여 개성적인 얼굴 표현을 연출해냈다. 석가모니불의 법의와 광배 등에는 주홍색으로 주로 채색하였고 주변의 보살이나 10대 제자 등의 의복에는 황색이나 녹색을 사용하고 있어 유난히 석가여래가 부각되어 보인다. 특이하게 보살들의 두광에 녹색과 청녹색 2가지를 사용하고 있는 점도 색채의 조화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아미타불회도는 영산회도와 마찬가지로 아미타여래를 화면 중앙의 상단에 배치하고 그 주변으로 8대보살, 4명의 제자, 2명의 사방불을 배치하였다. 화면의 폭이 영산회도보다 작기 때문에 존상을 생략하여 화면을 간략하게 구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구성법은 중앙에 배치된 영산회도의 석가모니불을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 불화를 그린 붕우는 광덕사 삼세후불도가 유일한 작품 예이지만 대형 사찰의 중심 전각에 봉안되었던 불화를 수화승으로서 제작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18세기 중반의 영향력있는 화승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다른 화승인 사혜는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화승이다. 1715년부터 1730년까지는 필영(弼英)의 제자로 전라도 일대에서 활약하였고 1741년 광덕사 불화를 제작한 즈음부터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749년에 수화승으로 인찰과 함께 천안 광덕사 괘불도를 제작하였고 1750년에 축명, 인찰과 함께 예산 대련사 괘불도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광덕사 삼세후불도는 18세기 전반 충청도 지역 삼세후불도를 대표한다. 수화승으로 이 불화를 그린 붕우는 현전 작품이 거의 없지만 이 불화의 짜임새 있는 구성과 뛰어난 표현력을 볼 때 상당히 기량이 뛰어난 화승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는 다양한 안료를 활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서 주존을 부각시키거나 입체감있는 인물 표현 등을 시도하고 있어 그의 실험 정신이 높이 평가된다. 이 불화는 뛰어난 인체 묘사, 치밀한 구성, 실험적인 채색법 등 18세기 전반 불화 중에서도 작품성이 상당히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