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제헌병약조(改制憲兵約條)는 1906년 한국주차헌병대를 일본 국내의 헌병 체제 재편의 움직임과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고문경찰을 중심으로 한 경찰 기구 확충 방침에 따라 제14헌병대로 개편하고 그 조직과 인원, 그리고 권한을 축소한 조치이다.
일본군은 불법적으로 가설한 부산·서울·인천 간 군용 전신선을 수비한다는 명목으로 1896년 1월 25일 송을(送乙) 제223호에 의해 임시 헌병대를 창설하여 한국에 파견하였다. 이후 한국에 주둔하는 일본군 헌병대의 조직과 병력은 점차 확대되어 나갔다.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3년 12월 1일의 편제 개정을 통해 임시 헌병대는 한국주차헌병대(韓國駐箚憲兵隊)로 개칭되고, 한국주차군 사령관에 예속되는 상설 기관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장교 4명, 하사관 이하 133명에 불과했던 임시 헌병대는 1904년 총인원이 약 300명 규모로 늘어났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강요에 의해 1905년 11월 17일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12월 21일 칙령 240호에 의해 통감부 관제가 공포되었다. 1906년 2월 1일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헌병대의 상황도 바뀌게 되었다. 2월 9일 공포된 칙령 제18호 「한국에 주차하는 헌병 행정경찰 및 사법경찰에 관한 건(韓國ニ駐箚スル憲兵行政警察及司法警察ニ關スル件)」에 의하면, “한국에 주차하는 헌병은 군사경찰 외에 행정경찰 및 사법경찰을 관장한다. 단 행정경찰 및 사법경찰에 대해서는 통감의 지휘를 받는다”고 규정되었다. 이로써 헌병대의 권한은 일반적인 경찰 분야에까지 확장되었고, 그 경찰권의 행사는 통감의 지휘 하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일제는 본국 및 각 식민지와 점령지 영역 내에 배치되어 있던 헌병대 조직을 통일적인 제도 하에서 운용하기 위해 그 재편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고문경찰(顧問警察)을 중심으로 조선의 경찰기구를 정비·확충한다는 방침이 맞물려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 헌병대의 조직도 개편하게 된 것이다.
1906년 10월 29일 칙령 제278호 「헌병조례 중 개정의 건(憲兵條例中改正ノ件)」에 의해 한국주차헌병대는 해산되고 그 조직은 일본 본국의 헌병대 체제에 편입되어 ‘제14헌병대’로 개편되었다. 동시에 조선과 마찬가지로 대만의 헌병대는 ‘제13헌병대’, 남만주 지역의 헌병대는 ‘제15헌병대’로 개편되었다. 제14헌병대로 개편됨으로써 각지의 12개 헌병 분대 밑에 32개 헌병 분견소를 두었던 배치 체제를 7개 분대, 20개 분견소로 재편하였으며, 인원도 약 280명으로 약간 감축하였다. 또한 헌병대의 주된 임무도 일본 국내의 헌병대와 마찬가지로 군사경찰 업무로 제한되었다. 한국 파견 이래 확장을 거듭해오던 일본군 헌병대의 조직과 인원, 그리고 권한을 축소한 최초의 조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14헌병대 체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907년 7월 19일 일제에 의해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31일의 군대해산으로 인해 본격적인 무장 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군사력으로 이를 진압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 8일 공포한 칙령 제323호 「한국에 주차하는 헌병에 관한 건(韓國ニ駐箚スル憲兵ニ關スル件)」에 의해 제14헌병대를 한국주차헌병대로 다시 바꾸고 대대적인 확장을 개시하였다.
칙령 제323호에 의해 이제까지 중좌(中佐)급이었던 헌병 대장의 계급을 소장(小將)으로 격상시키고, 러일전쟁 당시 유럽에서의 대러 공작으로 두각을 나타낸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에게 이를 맡겼다. 당시 일본군 내에서 소장급 헌병 대장은 헌병대 전체를 관할하는 도쿄(東京) 헌병사령부의 하야시 타다오(林忠夫) 사령관뿐으로, 한국주차헌병대에 소장을 배치하는 것은 당시의 관례상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 이와 함께 편성 개정을 통해 헌병대의 인원도 총 806명 체제로 증원하였으며, 헌병대의 배치도 7개 분대 밑에 53개 분견소(간도 포함)를 두는 형태로 대폭 늘렸다. 이후 일본군 헌병대는 계속된 확장을 통해 1910년 7월 1일 헌병경찰제도가 실시될 즈음에는 한국인 헌병 보조원을 포함해 총인원이 약 7,500명에 이르게 되었다.
개제헌병약조는 ‘전시’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나날이 규모와 권한을 확장해 나가던 일본군 헌병대의 조직을 축소함으로써 한국 통치에 대한 군부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통감정치’를 강화하려는 시도였다는 측면이 강하다. 이는 어디까지나 일제가 한국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를 둘러싼 방법론의 문제에 불과했고, 한국의 입장을 배제한 일방적인 조치였다. 결국 항일운동의 격화에 대응하는 형태로 한국에서 일본군 헌병대는 확장을 재개하게 되고 군부의 영향력 또한 강화됨으로써 일시적인 조치로 끝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