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도는 동서남북의 사방을 지키며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인 사천왕을 그린 불화이다. 사천왕이 고려 시대에 불화로 표현되었는데 석가설법도 등이 그 예이다. 조선 시대에는 영산회상도, 아미타불도 등에 외호신장으로 자리하였다. 사천왕도가 독립적으로 제작되어 사찰 천왕문의 사천왕상 뒷면에 봉안되기도 했다. 사천왕은 보통 무장의 도상이지만 시대마다 그 세부적인 도상은 다르다. 들고 있는 지물은 비파, 보검, 용, 보주 등이다. 사천왕은 불?보살만큼 중요한 신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사천왕도를 배치할 때도 일정한 규칙을 따른다.
사천왕은 인도․중국‧한국에서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선신으로 크게 신앙되어 고대의 불탑(佛塔)이나 건물 등에 부조되거나 상으로 조성되었다. 신라시대부터 불탑이나 승탑의 호법선신으로 부조되던 사천왕상은 고려시대의 불화와 경변상도에서 설법회의 외호신장(外護神將) 혹은 설법을 듣는 청법중(請法衆)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영산회상도, 아미타불도 등에 외호신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사천왕도(四天王圖)가 독립적으로 제작되어 사찰의 천왕문(天王門)에 모셔진 사천왕상의 후면에 봉안되기도 하였다.
인도 고대의 수문신이나 방위신에 대한 신앙이 불교에 흡수되어 사천왕과 결합된 사천왕신앙은 중국뿐 아니라 신라시대부터 크게 성행하였다. 일반적으로 사천왕상은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험상궂은 얼굴에 칼과 창과 같은 무기를 든 채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형상으로 표현된다. 신라시대의 사천왕상은 중국 당(唐)에서 정립된 무장상의 도상이 수용되었고, 고려시대에는 송대(宋代)의 갑주(甲冑)와 투구를 입은 형상으로 표현되어 시대마다 도상과 지물이 다르다. 조선시대의 사천왕 도상은 티베트 불교의 사천왕도상을 따르고 있는데, 화려한 갑주를 걸치고 지물로 보탑(寶塔)과 동(幢), 비파(琵琶), 보검(寶劍), 용과 보주를 들고 있다. 티베트 불교의 사천왕도상은 고려 말부터 유입되기 시작하여 조선 15세기 초에 왕실과 명황실과의 교류를 통해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특히 명황실에서 조선에 보낸 『제불여래보살명칭가곡(諸佛如來菩薩名稱歌曲)』과 같은 판본이 조선에 유포되면서 사천왕 도상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 판본의 사천왕도상은 점차 변용되어 16세기 후반 영산회상도, 아미타불도 등에서 호법선신으로 표현되었다.
사방의 공간을 수호하는 사천왕은 2차원의 평면인 불화에 배치될 때에는 일정한 규칙을 따른다. 본존을 중심으로 동서와 북남이 대칭하여 존재하는 것을 기본개념으로 할 때, 북쪽이 주존의 왼쪽으로 틀어져 북서쪽에 북방 다문천이 위치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형식의 배치법은 석굴암에서 보이는 통일신라 이래의 전통적인 배치방식으로 고려불화에까지 적용된다. 반면 북쪽이 주존의 오른쪽으로 틀어져 북방 다문천이 북동쪽에 위치하는 배치법은 주로 조선 후기 불화에 보이는 사천왕의 배치형식이다. 이러한 사천왕의 배치형식은 천왕전에도 적용되어 대부분 대웅전 등의 중심전각을 향하여 북동방향에 북방다문천이 봉안된다.
우리나라에서 불화에 사천왕이 그려진 예는 고려불화의 석가설법도(釋迦說法圖)나 지장도(地藏圖) 등과 사경(寫經), 목판본(木版本)에 보이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조선시대의 영산회상도, 아미타불회도, 지장시왕도 등에서 볼 수 있다. 사천왕만을 그린 독립된 형식의 사천왕도는 현재 홍익대학교박물관(1758년), 영국박물관(British Musuem, 18세기 말∼19세기 초), 경상남도 부산 범어사(1869년), 경상북도 대구 동화사(1896년), 영광 불갑사(1904년) 사천왕도 5점이 전한다.
사천왕은 신장상으로서 불‧보살만큼 중요한 신앙적인 의미를 지니며, 중국과의 불교교류를 통해 사천왕 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어 양국 간의 불교문화의 교류양상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