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중·후반에 경상북도 경주 불국사에서 거주하면서 안동 봉정사와 양산 통도사, 청도 운문사, 김천 직지사, 영천 은해사 등 영남 중북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서산 개심사까지 그 활동영역을 넓히기도 하였다.
생몰년은 알려진 바가 없고, 법호(法號) 역시 미상이다.
유성(有誠)은 1755년에 청도 운문사의 삼신불도 조성에 동참하였으며, 같은 해 임한(任閑)을 수화승으로 한 운문사 삼장보살도의 제작에도 동참화승으로 참여하였다. 1765년에는 자인(自仁)을 수화승으로 해 봉정사 감로도를 제작하였는데 이후 독립된 행보를 펼치게 된다. 1766년에는 봉정사에서 청허당대사진영·송운당대사진영·환선당대선사지안진영·포월당대선사초민진영·설봉사대선사사욱진영 등을 조성하여 영남 중북부의 대표적인 수화승으로 성장하였다. 유성의 화풍은 개심사 영산회괘불도(1772)와 모운사 지장시왕도(1770)의 존상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동시기에 활동한 임한·두훈(斗熏)과 유사한데 18세기 후반 영남에서 선호되던 화풍을 고수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화 형식에 있어 변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1766년부터 1778년까지 봉정사 고승들의 진영을 조성하면서 다양한 얼굴 표현과 지물, 장삼표현 등을 통해 특색 있는 승려의 초상을 제작하였으며, 서악사의 아미타불회도(1770)·은해사 기기암의 신중도(1777)·직지사 심적암의 극락세계구품회도(1778) 등에서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구성과 도상으로 새로운 형식의 불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유성이 부일(富日)을 수화승으로 해 조성한 서악사 아미타불회도는 화면 하단 좌우에 원형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사천왕을 배치하였다. 원형으로 공간으로 구획하는 방식은 갑장사 아미타불회도의 경우와 같이 18세기 후반에 경상북도 상주를 중심으로 시도되었던 화면 구획법이다. 또한, 탁자에 걸터앉은 사천왕 표현은 19세기 후반 경기지역의 후불도에서 유행한 바 있다. 유성은 조선시대에 간행된 명대(明代)의 「관무량수경변상도(觀無量壽經變相圖)」 도상을 불화에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즉 「관무량수경변상도」의 도상 가운데 벽련대(碧蓮臺)의 표현을 봉정사 감로도에 반영했고 좌협시 보살의 발우 표현을 서악사 영산회상도에 투영하였다. 더 나아가 유성은 이를 바탕으로 16관 변상을 재구성하였는데 직지사 심적암의 극락구품도(1778)에서 살필 수 있다. 이 작품은 동화사 극락구품도(1841)·밀양 표충사 구품도(1882)·서울 화장사 극락구품도(1893)의 작풍으로 전승되었고, 운문사 극락구품도(1883)·통도사 취운암 극락구품도(19세기)를 통해 다른 유형으로 변형되기도 하였다. 유성은 경북 일대뿐 아니라 영남 지역에 영향을 끼친 18세기의 역량 있는 화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