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에 활동했던 도화서 화원으로, 조선 전기 화원(畫員)인 이상좌(李上佐)와 동일 인물이다. 이자실 보다 이상좌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자실’이란 이름은 대표적인 왕실발원(王室發願) 불화인 도갑사(道岬寺) 관음삼십이응신도(觀音三十二應身圖)(1550년, 일본 지온인(知恩院) 소장)의 화기(畫記)에 처음 기록되면서 알려졌다. 이 불화는 조선 인종(仁宗)의 왕비(王妃)였던 인성왕후(仁聖王后)의 발원으로 제작되었다.
이자실의 이름은 몇몇 기록에서 나타난다. 먼저 도갑사 관음삼십이응신도의 화면 하단 우측에 불화를 그린 제작자로 ‘이자실(李自實)’이 기록되어 있다. 또 이 불화에는 조선 인종(仁宗)의 왕비(王妃)였던 인성왕후(仁聖王后)가 돌아가신 남편인 인종의 명복을 빌고 그의 선가(仙駕: 돌아가신 분을 일컫음)가 정토(淨土)에 다시 태어나기를 기원하기 위하여 양공(良工)을 모집하고 불화를 그리게 하였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 불화는 종교화로서는 드물게 배경이 되는 화면 상단을 비롯하여 장면장면 마다 산수 표현이 부차적 차원을 넘어 그림의 주된 요소가 되었다. 특히 중앙의 관세음보살 주변에 표현된 응신(應身: 관세음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그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 모습) 장면은 언덕과 그 위에 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그 모티프나 표현 기법에서 당시 화원들이 그린 산수화를 연상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이자실을 화원으로 추정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잡과방목(雜果榜目: 조선시대 잡과인 의과, 역과 등에 합격한 사람의 명단) 중 하나인 『의과방목(醫科榜目)』(미국 하버드대학교 소장본)에서 ‘이자실’이란 이름이 발견되었다. 이 기록은 견후증(堅後曾)이란 사람의 기록으로, 그는 1605년(선조 38) 의과시에 합격한 인물이었다. 대개 방목에는 본인을 중심으로 친가와 처가의 4대조 이름이 명시되는데 처가와 관련하여 처부(妻父)가 도화서의 화원이었던 이흥효(李興孝)이며 처조부(妻祖父)가 이자실, 또는 어떤 본(一本)에서는 이배련(李陪蓮)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흥효의 아버지는 조선 전기 남송원체풍의 그림을 잘 구사했던 이상좌로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자실이 이상좌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근래 발굴된 조선 후기 수장가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이 수집한 그림들을 모아놓은 화첩인 『석농화원(石農畫苑)』 보유편(補遺編)을 통해서 이자실이 16세기의 화원 이상좌와 동일 인물임이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현재 이상좌, 즉 이자실의 불화로도갑사 관음삼십이응신도 외에도 나한도 초본인 『이상좌불화첩(李上佐佛畫帖)』 등이 남아 있지만, 그는 불화보다는 뛰어난 기량으로 노비에서 속량(贖良: 종의 신분에서 벗어남)되어 중종(中宗)의 어용을 그렸고 16세기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畵風: 조선 전기에 유행했던 중국의 남송대 화원의 화풍)을 잘 구사했던 화원으로 더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상의 자료를 통해 이자실은 중종이 돌아가시자 그 어용을 그렸을 뿐 아니라 인종의 사후 영가천도를 기원하기 위한 불화인 도갑사 관음삼십이응신도의 제작에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도화서 화원이 궁중에서 소용되는 그림을 그리는 일 뿐만 아니라 왕실에서 발원한 불화 제작에도 직접 참여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화승(畫僧)이 왕실발원 불화를 제작하였음을 볼 때 16세기 화원의 불화 제작은 특기할 만하다. 화원이 제작한 불화에는 당시 화원이 구사했던 화풍이 투영되어 있다.
16세기 왕실발원 불화의 제작자를 알 수 있는 명확한 자료이며 특히 도화서 화원이 불화를 조성하였다는 명확한 전거를 보여준다. 현전하는 16세기 왕실발원 불화에 산수화의 요소가 투영된 점이나 중국 명(明)으로부터 유입된 화풍이 불화에 반영된 점도 이와 같은 사실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