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미군정청 학무국이 한국 교육의 장기적인 전망과 교육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한국인 교육자 및 각계 지도자가 참여하는 교육자문기구를 설치하였다.
미군정 초기 교육정책 담당부서였던 학무국은 한국인이 참여하는 교육자문기구를 설치하였다. 1945년 9월 16일 학무국은 당면한 교육과제 해결을 위해 한국인 교육자 7인으로 구성된 한국교육위원회를 설치하여, 해방 후 일시적으로 문 닫았던 각급학교의 개교 시기, 일본인 및 친일파 교사 · 학교장 · 각 도의 교육 책임자를 한국인으로 교체하는 문제, 교과서 및 교육과정 구성 문제, 학무국의 한국인 직원 추천 문제 등 당장의 교육 현안을 다루었다.
당면 과제를 해결한 학무국은 중장기 교육계획 수립을 위해 조선교육심의회를 설치하였다. 1945년 11월 14일에 열린 제1차 전체 회의에는 한국인 교육자 · 언론인 · 정치인 및 군정청 직원 1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이 회의에서 교육이념, 교육제도, 교육행정, 초등교육, 중등교육, 직업교육, 사범교육, 고등교육, 교과서, 의학교육 등 10개의 분과위원회를 두기로 결정하였다.
각 분과위원회는 매주 1~3회 회의를 열고 학무국에서 마련한 의제에 대해 협의하고, 그 결과를 전체 회의에 제출해 최종 결의하였다. 전체 회의 심의 결과는 학무국에 건의되었으며, 상당 부분 수정 없이 원안대로 실행되었다. 4개월 동안 분과위원회는 105회, 전체 회의는 20회가 열렸으며, 1946년 3월 7일 전체 회의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종료하였다.
조선교육심의회가 자문기구였던 만큼 그 영향력을 제한적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기구 설치 제안부터 교육 의제에 대한 논의 과정을 한국인이 주도하고 미국 측은 조언자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심의회의 결정 내용에 대해 학무국은 대부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 대해 한국인이 심의회를 통해 미군정청의 교육정책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심의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인사들은 대부분 친미 성향이거나 보수적인 성향의 인사들로서, 정부 수립 이후 교육 주도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로 인해 한국 교육엘리트의 정치 성향과 문화 지향성의 편향을 만들어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한, 미국이 한국인 자문기구를 설치해 교육정책에 활용한 것은 한국 교육에 관한 정보 부족 등의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미국인들에 의한 정책 결정과 집행 과정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만을 방지하려는 의도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