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는 과열과외 해소 방안의 하나로 졸업정원제를 추진하였다. 과열 과외의 근본 원인이 대학문이 좁은 데 있다고 보고, 입학 인원을 정원의 130%로 확대해 대입 경쟁을 완화함으로써, 과열과외 해소, 재수생 감소, 중등교육 정상화의 효과를 기대하였다.
그리고 입학은 쉽게, 졸업은 어렵게 함으로써 대학의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고, 대학의 입학 · 졸업 · 편입학에 따른 학사 부조리를 척결하며, 사립대학의 재정적 어려움 해소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또한 정통성이 약한 신군부세력은 심각한 교육문제 해결을 통해 민심 안정 효과를 기대하였다.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와 1974년 고교 평준화 정책 도입으로 중등교육 기회는 점차 확대되었으나, 1965년 대학정원령 시행 이후 고등교육 기회는 억제되었다. 이로 인해 선발 시점이 대학으로 옮겨지면서 대학입시에서 병목현상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입시 경쟁이 더 치열해지고, 과열 과외와 재수생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문교부는 『1978년 교육계획』에서 향후 대학교육을 정예교육에서 보편교육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발표하고 졸업정원제를 검토하였다.
그러나 제도 시행을 위한 선결 요건인 교원 확보 및 시설 확충이 해결되지 않아 졸업정원제는 바로 시행되지 못했다. 그런데 1980년 1월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해소 방안’이라는 제목의 ‘7 · 30교육개혁조치’ 일환으로 졸업정원제 추진계획을 발표하였다. 졸업정원제 시행에 대한 공방이 이루어졌지만, 신군부는 1981학년도 입학생부터 전면 시행하였다.
졸업정원제의 요지는 각 대학의 여건 및 특성과 무관하게 졸업정원의 130%(전문대 115%) 학생을 모집하고, 이후 초과된 모집 인원은 학사경고, 유급, 강제 중도 탈락(수료) 등으로 졸업정원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대학의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일정 비율을 강제 모집, 강제 탈락시키는 졸업정원제의 폐단은 처음부터 큰 비판에 직면하였다. 결국 문교부는 제도 시행 초기부터 전면 재검토에 들어가 두 차례 개선안을 발표하였다.
1차 개선안(1983.8.19.)에서는 의학 및 가정계열, 여자대학의 모집 비율을 100~130% 내에서 자율화하고, 졸업정원제 운영단위(계열별 또는 학과별 운영)와 학년별 탈락률을 대학이 자율 조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4학년 수료자 대상으로 학사자격고시 기회를 부여하고, 결원이 있는 학과에 전과와 편입학을 허용함으로써 제도의 경직성을 완화하였다.
한발 더 나아가 2차 개선안(1984.4.6.)에서는 1985학년도부터 신입생 모집 비율을 100~130% 범위 내에서 대학 자율에 맡겨, 졸업정원제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1984년 학 · 처장 회의에서는 중도 탈락자를 유급 형태로 구제했으며, 1986년 6월에는 졸업정원 초과자도 비율에 상관없이 학사자격고사에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1987년 졸업정원제는 폐지되었고 1988년부터 입학정원제로 환원되었다.
당초 졸정제는 1970년대 중반 이후 고등교육의 대중화와 교육의 질 제고를 동시에 추구하는 차원에서 구상되었으나, 신군부는 입학기회 확대에만 초점을 두고 졸정제를 강행하였다. 졸정제를 통해 대학 입학기회가 파격적으로 확대되었으나, 이에 따른 교육의 질 관리 방침은 졸업정원 유지를 위한 강제탈락률 조치로 한정되었고 실제로 구현되지도 못하였다.
졸정제 시행을 계기로 1980년대 이후 한국 고등교육은 질적 여건을 확충하지 못한 채 양적 팽창 측면에 치우쳐 발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