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역절목변통사의 ()

조선시대사
개념
1751년 6월, 홍계희가 균역법의 제정 과정에서 논란이 된 급대 방안에 대해 상소에 붙여 제출한 논설.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균역절목변통사의」는 1751년 6월, 감필 조치 이후 급대 재원 마련 과정에서 홍계희가 제시한 급대 방안이다. 홍계희는 이 논의에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결전 5전을 징수하는 안, 둘째는 결전 1냥을 징수하는 안, 셋째는 금위영과 어영청의 군제 개편안이다.

정의
1751년 6월, 홍계희가 균역법의 제정 과정에서 논란이 된 급대 방안에 대해 상소에 붙여 제출한 논설.
개설

「균역절목변통사의(均役節目變通事宜)」는 홍계희(洪啓禧)가 1751년 6월에 제출한 일종의 논설로, 균역법의 제정 과정에서 논란이 된 급대(給代)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균역법(均役法)은 종전 2필 혹은 3필을 징수하던 것을 1필로 균일화하여 징수하는 법안이다. 이 과정에서 각 관청의 축소된 재원을 보완하고자 하는 것이 급대이다. 홍계희는 이 글에서 당시 논의되던 여러 가지 제안 중에 세 가지를 제시하며 국왕의 결정을 촉구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 후기 양역(良役)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가운데 영조 연간 균역법의 제정은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당시 여러 가지 논의 방안이 제시되었으나 결국 1750년(영조 26) 7월, 2필 혹은 3필을 징수하던 것을 1필로 균일화하여 징수하자는 감필론(減疋論)이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이후 논의는 감필로 인한 재정 손실분을 어떻게 보충할 것인가, 즉 급대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전환되었다.

내용

1750년 7월에 감필이 결정되면서 균역법 운영을 위한 균역청(均役廳)이 설치되고, 시행 세목인 균역사목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급대 재원 마련을 위한 마땅한 방안이 마련되지 못하자, 이 과정에서 홍계희는 평소 자신의 주장이던 결포론(結布論)에 입각한 결전(結錢) 징수를 주장하였다. 결포론이란 토지에 부과하여 징수하자는 방안이다. 홍계희는 앞선 자신의 주장인 호포론을 철회하고 결포론으로 선회한 인물이다. 그는 균역법 제정 과정에서 결포론이 배제되자, 이를 활용한 급대 방안으로 결전 징수를 주장하였다. 결포론에 입각하여 부족한 재원의 마련을 위해 1결당 5전(錢) 정도의 결전을 징수하자는 내용이었다.

홍계희는 「균역절목변통사의」에서 자신이 주장한 5전의 결전 징수 방안을 포함해 몇 가지 급대 방안을 제시하며 이 중 한 가지를 채택할 것을 촉구하였다.

첫 번째 안은 자신이 제시한 5전의 결전 징수 방안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결전의 징수를 반대하는 이유는 추가로 세금을 부과하는 가부(加賦)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는 토지가 있으면 조(租)가 있다는 ‘유전즉유조(有田則有租)’ 원칙에 따르면 결전 징수는 당연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당시에 양역이 문제가 된 것은 토지가 없는 백성에게 역을 부과하였기 때문이며 문제의 해결은 토지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1결에 5전을 징수하는 것은 부담되는 양이 아니라고 하며, 지주와 작인(作人)이 반반씩 부담하자고 하였다. 그는 6도의 전답 60만결에서 동전 5전을 거두면 30만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두 번째 안은 1결에 1냥을 징수하는 안이었다. 이 안은 당초 공주(公州)의 진사인 민우하(閔遇夏, 또는 閔宇夏)가 제시했던 안이다. 민우하는 당시 급대 방안의 하나로 정해진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와 어염선세에 대해 양반들이 반발을 하자 이를 폐지하고 대신 1결당 1냥을 징수해 급대 재원을 마련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이 안은 결전의 부담을 지주가 아닌 작인에게 징수하자는 것이었다. 홍계희는 이 안에 대해서 균역의 본래 취지에 따라 부유한 백성에게 부담을 주되, 가난한 군졸에게 공통으로 혜택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세 번째 안은 중앙 군영인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군제를 개편하고 군현(郡縣)을 통합하는 방안이었다. 이 방안은 당초 조현명(趙顯命)이 제시했던 안으로, 지방에서 상번하는 금위영과 어영청의 군사를 모두 납포군(納布軍)으로 만들고 대신 서울과 경기에서 1만 명 정도를 선발하여 군사를 줄이고, 군현을 통폐합하여 재정 지출을 줄이자는 방안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7만 4천여 냥이 절감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 방안에 대해 홍계희는 군제를 개편하면 어염선세를 징수하는 만큼의 효과가 있을 것이며, 군현의 통폐합은 이미 유형원(柳馨遠) 등이 제기했던 안으로서 무리 없이 시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홍계희의 「균역절목변통사의」가 제출된 다음 날인 6월 3일 영조는 문신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에서 책제(策題)로 급대 방안을 물었고, 이어 6월 4일에는 홍계희가 거론한 공주의 진사 민우하를 불러 그 대책을 물었다. 6월 17일에는 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지방의 유생이나 향리와 군사 등을 불러 결전의 편리 여부를 순문(詢問)하였다. 6월 21일 시원임대신과 비변사 당상과 균역청 당상 등을 불러 모아 회의한 결과 결전 징수가 최종적으로 채택되었다.

의의와 평가

홍계희가 「균역절목변통사의」에서 제시한 급대 방안 중 결전 5전 징수 방안이 이후 균역법 정책에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그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종래 인신(人身)에 부과하던 역(役)을 토지에 부과하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원전

『영조실록(英祖實錄)』

단행본

정연식, 『영조대의 양역 정책과 균역법』(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5)

논문

이근호, 「담와 홍계희의 사회경제 정책 구상: 양역변통론을 중심으로」(『한국실학연구』 27, 한국실학학회, 2014)
정연식, 『조선 후기 역총의 운영과 양역 변통』(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