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639년(백제 무왕 40)에 백제 왕후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제작한 사리장엄구이다. 2009년 서탑 해체 과정에서 발견되었고, 금제사리봉영기의 기록을 통해 조성시기와 조성배경, 발원자 등을 알 수 있다. 사리기의 형태와 제작 방식, 시문된 문양 등을 통해 백제 금속공예의 예술성과 기술사를 증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2018년 6월 27일 보물로 지정되었고, 국립익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639년(백제 무왕 40)에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사찰을 창건하고, 사리를 봉영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제작하였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은 미륵사지 서원(西院)에 남아 있는 석탑이다. 이 탑은 목탑의 형태를 그대로 모방하여 축조한 탑으로 1층 탑신 네 면에 문을 내어 사방에서 출입할 수 있는 구조이다. 탑 내부는 십자형 통로를 만들고 그 중앙에 심주석(心柱石)을 세웠다.
사리장엄구는 2009년 서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1층 탑신의 심주석 중 가장 아래쪽을 받치던 심주석재의 상면(上面)에 구비된 가로 25㎝, 세로 25㎝, 깊이 27㎝의 방형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사리장엄구 중에서 금동제사리외호 1점, 금제 사리내호 1점, 금제 사리봉영기 1점, 청동합 6점 등 총 9점은 2018년 6월 27일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익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리기는 금동제사리외호와 금제사리내호 그리고 갈색의 유리제사리병 등 3중으로 중첩되는 구조로 제작되었으며, 이외에도 금판, 금괴, 금제구슬, 금제고리, 금제족집게, 금동제고리, 은제관식, 은제과대장식, 은괴, 청동합, 유리판, 유리구슬, 진주구슬, 호박, 곡옥 등 사리봉안에 따른 각종 공양품과 장엄구 등이 함께 봉안되었다.
발견 당시 사리장엄구의 배치는 바닥에 사리공 크기에 맞춰 제작된 가로 23㎝, 세로 23㎝, 두께 1㎝의 유리판을 깔고 그 위 네 모서리에 원형의 청동합 6개, 그 사이는 유리구슬로 채운 뒤 은제관식과 금제소형판, 직물에 싼 도자(刀子) 등을 각기 올려놓았다. 그리고 남측 벽면에 비스듬히 금제사리봉영기를 배치하고 정중앙에 금동제사리호를 안치하였다.
유리구슬을 사리공 내에 가득 채운 다음 사리기를 안치하는 사리봉안 방식은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 수습 당시의 모습과 유사하여 그 관련성이 주목된다.
금동제사리호는 뚜껑과 상부 동체 및 하부 동체가 각기 분리되는 구조로 제작되었으며, 하부 동체의 상단에 ‘ㄴ’자형의 홈을 파서 상부 동체에 고정된 못을 돌려서 결합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이처럼 상하부의 동체를 분리 · 결합한 방식은 내부에 금제사리내호를 안치하기 위해 고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제사리호의 표면에는 6단의 횡선(橫線)을 비롯하여 어자문(魚子紋)과 연주문(連珠紋), 연판문(蓮瓣紋), 권초문(捲草紋), 삼엽문(三葉紋) 등의 다양한 문양을 시문(施紋)하였다. 연판문과 권초문, 삼엽문은 윤곽선을 따라 짧은 빗금을 새겼는데, 이는 능산리사지 출토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무령왕릉 출토 은제동탁, 부소산성 출토 금동광배의 문양 등에서 보이는 백제 특유의 표현 방식이다.
또한 시문된 문양들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상부 동체의 주문양이라 할 수 있는 고둥모양으로 말린 넝쿨 표현이다. 이러한 문양은 국내의 삼국시대 작품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되는 것으로, 지금까지 확인된 비교 사례는 일본 쇼소인[正倉院] 소장의 감색 유리잔의 잔받침이 유일하다. 이 유리잔은 일반적으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일본으로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미륵사지 서탑의 사리장엄구가 공개된 이후에는 문양의 동질성을 근거로 백제 전래설이 새롭게 제기되기도 하였다.
금동제사리호의 내부에는 금제사리내호를 비롯하여 각종 유리구슬과 금제구슬, 향분으로 추정되는 유기물 등이 있었다.
금제사리내호는 금동제사리외호와 달리 뚜껑과 상부 동체는 일체형으로 제작되었고, 하부 동체와는 분리되는 구조이다. 내호 안에는 금제구슬, 유리구슬, 사리 등과 함께 유리제사리병의 파편이 발견되어 금동제사리외호-금제사리내호-유리제사리병의 3중 구조임이 확인된다.
내호의 표면에는 외호와 마찬가지로 횡선과 어자문, 연주문, 연판문, 삼엽문 등의 문양을 새겼으나, 외호와 달리 이중 원권(圓圈)을 두고 연주문을 배치한 환연주문, 혹은 다소 큰 원문(圓紋)과 그 주변으로 작은 연주문을 두른 모습 등이 눈에 띤다. 이 환연주문은 백제의 사리기 중에서는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내합에서도 확인되며, 삼엽문의 형태와 시문방식도 왕궁리 오층석탑의 유리제사리병의 받침에 시문된 형태와 매우 흡사하여 주목된다.
이와 함께 앞서 언급한 사리봉안 시, 유리구슬을 깔고 사리기를 안치하는 방식도 유사했던 점을 상기해본다면 백제의 사리장엄구 특히,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오층석탑의 사리장엄구 간의 밀접한 관련성을 살펴볼 수 있다.
금제사리봉안기는 장방형의 모습으로 가로 15.3cm, 세로 10.3cm, 두께 0.13cm이다. 앞면에 99자, 뒷면에 94자로 각각 11줄씩 총 193자를 각자(刻字)하였으며, 주사(朱唦)를 사용하였다. 내용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가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인 639년에 사리를 봉영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발원문으로, 이를 통해 사찰의 조성배경, 발원자, 석탑의 건립시기를 알 수 있다.
사리기와 사리봉영기 그리고 사리공 내에 봉헌된 많은 공양품 중에서 주목되는 것으로 청동합 6개, 금판, 은제관식 등이 있다.
청동합은 원형의 합으로 크기와 형태가 각기 다른 6개가 발견되었다. 이 중에는 "상부달솔목근(上部達率目近)"이라는 명문을 새긴 것이 있으며, 총 18점이 수습된 금판 중에서도 3점에는 "중부덕솔지수시금일량(中部德率支受施金一兩)", "하부비정부급부모처자(下卩非政夫及父母妻子, 전면)/ 동포시(同布施, 후면)", “량(凉)” 등의 명문이 확인되어 당시 행정체계와 관등, 시주자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금판은 화폐의 기능을 담당했던 금정(金鋌)으로 추정되고 있다. 은제관식은 2점이 발견되었는데, 조사 결과 1점은 실제 사용했던 관식으로 확인되었다. 사용 흔적이 있는 이 관식의 경우 발원자가 직접 착장했던 것이거나 발원자와 관련된 가족 및 망자 등과 관련된 물품을 봉헌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당시 사리봉안 의식의 단면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639년에 봉안되었던 당시의 모습 그대로, 비교적 완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제사리봉안기의 명문을 통해 미륵사의 창건 성격과 백제 왕실의 왕후가 발원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 삼국유사』에 기록된 미륵사의 창건 내용을 보강하는 자료가 된다. 그리고 639년 탑 내에 사리를 봉영했다는 절대연대를 바탕으로 서탑의 건립 시기가 확인되며, 한국탑파사에 있어 목탑으로 번안된 시원(始原) 석탑의 구체적인 시기를 비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또한 사리기의 형태와 제작 방식, 시문된 문양 등을 통해 당대 조성된 백제 금속공예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으며, 동시대 백제의 다른 사리장엄구와 동아시아 공예품들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 해당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게다가 봉헌된 다양한 공양품들과 그에 새긴 명문 등을 통해 백제의 행정 체계와 관등 및 시주자, 사리 봉안의 의식, 대외 교류 등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 학술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