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서원 ()

유적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이경번과 이경무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이칭
이칭
여양사(廬陽祠)
정의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이경번과 이경무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개설

1720년(숙종 46)에 이경번(李景藩, 1606∼1673)과 이경무(李景茂, 1609∼1679)를 향사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처음에는 여양사(廬陽祠)라는 사우로 건립되었다가 1789년(정조 13)에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안택(安宅)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02년(순조 2)에는 조삼(趙參, 1473∼?), 박오(朴旿), 이명호(李明怙, 1565∼1624)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복원되지 못하였다. 1978년에 여주이씨 후손과 지역민들의 공의로 옛 서원터에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내용

주향인 이경번과 이경무는 함안에 세거해 온 여주이씨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 향리에서 학문에 종사하였다. 둘 다 뛰어난 효행으로 1876년(고종 13)에 나라에서 정려를 받았다. 이경무의 문집으로 『만묵당집(晩默堂集)』이 있다.

안택은 본관이 광주로 1540년(중종 35) 소과에 입격하였다. 본래 의령에 세거하다 조세번(趙世蕃)의 딸과 결혼하면서 함안에 거주하였다. 조삼은 생육신 조려(趙旅)의 손자로,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여 창원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함안 조남산 아래 무진정(無盡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기거하였다. 박오는 본관이 함안으로 무안현감을 지낸 박유(朴榴)의 손자이다. 사후 형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이명호는 본관이 광평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주역(周易), 예기(禮記), 하도낙서(河圖洛書), 기삼백(碁三百), 혼천의(渾天儀) 등에 두루 통달하였다. 소과에 입격하였으나 출사하지 않고 함안에 매죽헌(梅竹軒)이라는 정자를 지어 평생 학문하였다. 신산서원입규(新山書院立規), 향학입규(鄕學立規), 교중입규(校中立規) 등을 저술하였으며, 문집으로 『매죽헌집(梅竹軒集)』이 있다.

1789년에 조삼, 박오, 이명호를 추배할 때 봉안문은 유심춘(柳尋春)이 썼다. 1839년(헌종 5)에 여양서원에서 이경무의 문집인 『만묵당집』을 2권 1책으로 간행하였으며, 송치규(宋穉圭)가 서문을, 이주신(李柱新)이 발문을 지었다.

의의와 평가

18세기 초 여주이씨의 문중사우로 출발하여 서원으로 승격된 뒤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순흥안씨, 함안조씨, 함안박씨, 광평이씨를 추배해온 과정은 지역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문중 연합체적 성격을 띠었던 조선 후기 서원의 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참고문헌

『강고집(江皐集)』
『강재집(剛齋集)』
『기언(記言)』
『하계집(霞溪集)』
『경남의 서원』(구산우 외, 선인, 2008)
『함안군지』(함안군지편찬위원회, 함안군, 1997)
집필자
김자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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