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서원 ()

유적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었던 조선후기 채응린과 곽재겸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이칭
이칭
유호리사(柳湖里祠), 유호사(柳湖祠)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었던 조선후기 채응린과 곽재겸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개설

정종로(鄭宗魯, 1738∼1816)의 행장에 따르면, 유호서원(柳湖書院)은 채응린(蔡應麟, 1529∼1584)과 곽재겸(郭再謙, 1547∼1615)을 제향하기 위해 1784년(정조 8)에 지묘동에 건립한 유호리사(柳湖里祠)에서 출발하였다. 「달류재기(達流齋記)」에 따르면, 곽재겸의 고택이 있던 유계(柳溪)와 채응린이 머물던 금호(琴湖)의 옛 정자가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채응린과 곽재겸 사후 두 사람의 도학과 행적을 기리기 위해 사우를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다. 후에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이 유계와 금호의 지명에서 따서 ‘유호서원’이라 칭하고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사적 변천

유호리사는 유호서원으로 승격된 뒤 참봉 정위(鄭煒)가 「유호서원승호시고유축문(柳湖書院陞號時告由祝文)」을 지어 채응린과 곽재겸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후 강당을 지어 이광정(李光靖)이 동쪽 협실은 ‘근사(近思)’, 서쪽 협실은 ‘잠수(潛修)’라 이름하였다. 1797년(정조 21)에 서재를 완성하여 ‘달류재(達流齋)’라 편액하고, 동재는 1805년(순조 5)에 완성하여 ‘소원재(溯源齋)’라 편액하였다.

내용

채응린은 자가 군서(君瑞), 호는 송담(松潭), 본관은 인천이다. 퇴계의 제자인 전경창(全慶昌)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나, 을사사화 이후 과거에 뜻을 접고 금호강변(琴湖江邊)의 왕옥산(王屋山) 기슭에 소유정(小有亭)과 압구정(狎鷗亭)을 지어 명유(名儒)들과 시를 읊으며 학문에 종사하였다.

곽재겸은 자가 익보(益輔), 호는 괴헌(槐軒), 본관은 현풍이다. 장현광(張顯光)·서사원(徐思遠) 등과 교유하였으며, 1573년(선조 6) 김우옹(金宇顒)의 추천으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1784년 유호리사 건립 당시 「유호리사상량문(柳湖里祠上樑文)」은 찰방 남경희(南景羲)가, 「유호리사봉안문(柳湖里祠奉安文)」과 축문은 교관 이광정이, 「유호리사기(柳湖里祠記)」는 지평 이만운(李萬運)이 지었으며, 모두 채응린의 문집인 『송담실기(松潭實紀)』에 수록되어 있다. 서원으로 승격된 뒤 1797년에 낙성된 서재의 기문인 「달류재기」는 목만중(睦萬中)이, 1805년에 낙성된 동재의 기문인 「소원재기(溯源齋記)」는 최흥벽(崔興璧)이 지었다.

참고문헌

『두와집(蠹窩集)』
『송담실기(松潭實紀)』
『여와집(餘窩集)』
『입재집(立齋集)』
『치암집(癡庵集)』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people.aks.ac.kr)
집필자
김자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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