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4년(순조 24)에 창건하여 우계(牛溪) 성혼(成渾), 명재(明齋) 윤증(尹拯),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를 제향하던 서원이다.
『명산서원지(明山書院誌)』에는 1824년에 경주 월성(月城) 동쪽 10리에 있는 명활산(明活山) 북록(北麓)에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원의 유래는 향인(鄕人) 허홍(許弘)과 이성락(李成洛) 등의 주도로 1824년에 ‘활재(活齋)’라는 강당을 지은 데서 출발하였다. 1836년(헌종 2)에 성혼의 위패를 강당에 봉안하고 주자의 창주정사 고사를 따라 석채례를 지내오다가, 1840년(헌종 6)에 묘우를 지어 서원의 제도를 갖추었다. 이듬해인 1841년에는 윤증과 박태보를 추가로 배향하여 세 선생을 병향하게 되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이후 서원터에 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모셔오다가, 1904년 파평윤씨와 진주강씨 등을 중심으로 ‘보인계(輔仁契)’를 조직하여 현재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서원 관련 기록으로는 강필효(姜必孝)가 지은 우계 성혼의 봉안문과 축문, 필사본 『명산서원지』, 「보인계안(輔仁契案)」, 「명산서원유생안(明山書院儒生案)」 등이 있다. 1836년에 성혼의 위패를 봉안할 때의 봉안문과 축문은 『해은유고(海隱遺稿)』에 수록되어 있으며, 1904년에 조직한 보인계의 구성원 명단인 「보인계안」과 「명산서원유생안」은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개인 소장의 필사본 『명산서원지』가 현존하는데, 여기에는 서원의 위치, 창건 과정의 전말, 세 선생 상향축문, 원규(院規), 서실의(書室儀), 이안후기(移安後記), 상량문, 세 선생 사적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말미에 1908년 무신년 가을 향사 때 참석한 유생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경주지역의 대표적인 소론계 서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