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양서원 ()

유적
경상북도 군위군 소보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이세헌 등 3현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
이칭
이칭
오양사(梧陽祠), 오양정사(梧陽精舍)
정의
경상북도 군위군 소보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이세헌 등 3현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
개설

1840년(헌종 6)에 이세헌(李世憲, 1476∼1555), 이광준(李光俊, 1525∼1609), 정추(鄭錘, 1573∼1612) 등 3현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역사적 변천

서원의 기원은 이세헌을 모신 사우였던 ‘모덕사’에서 출발하였다. 모덕사에 있던 이세헌의 위패를 1728년(영조 4) 문소의 옥천사로 이안(移案)하였으나 1741년(영조 17)에 영조의 훼철령으로 옥천사가 훼철되었다. 100년 뒤인 1840년(헌종 6)에 운곡(雲谷) 이희발(李羲發) 등을 중심으로 한 영천이씨 후손들과 지역 사림들의 공론으로 이세헌과 그의 손자 이광준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오양사(梧陽祠)’라는 사우와 강당을 짓고 오양서원(梧陽書院)을 건립한 뒤 정추(鄭錘)를 추배하였다.

내용

이세헌은 본관이 영천, 호는 우암(牛巖)이다. 연산군 때 진사에 입격하였으나 사화를 피해 낙향하였다. 사후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군위읍 내량리에 ‘우암이선생유허비(牛巖李先生遺墟碑)’가 있다. 이광준은 이세헌의 손자로 호는 학동(鶴洞)이다. 1562년(명종 17)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청송부사, 충주목사,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정추는 호가 양졸재(養拙齋), 본관은 동래로, 칠곡의 동래정씨 입향조이다.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사림의 추중을 받았다. 사후 대산 이상정이 묘비문을 지었으며, 저서로 『양졸재선생실기(養拙齋先生實記)』가 있다. 오양서원이 훼철된 후 칠곡 지천면 연호리에 존경당(尊敬堂)을 세워 추모하고 있다.

훼철되기 이전 오양서원의 강당에는 ‘입교당(入敎堂)’이라는 편액을 걸고, 강당의 양쪽에 협실을 두어 동쪽은 ‘거인재(居仁齋)’, 서쪽은 ‘유의재(由義齋)’, 동재는 ‘관선재(觀善齋)’, 서재는 ‘유예재(遊藝齋’라 하였으며, 문루는 ‘광재루(光齋樓)’라 하였다.

이세헌과 이광준의 위패를 봉안할 때 「오양정사봉안문(梧陽精舍奉安文)」은 이가순(李家淳)이, 정추를 봉안할 때 「오양사정양졸재봉안문(梧陽祠鄭養拙齋奉安文)」과 「상향축문(常享祝文)」은 이만운(李萬運)이 지었다. 1849년에 간행된 목판본 『양졸재선생실기』가 한국학중앙연구원, 계명대학교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목판은 칠곡의 동래정씨 연곡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다.

참고문헌

『묵헌집(默軒集)』
『범암집(汎庵集)』
『양졸재선생실기(養拙齋先生實記)』
『하계집(霞溪集)』
유교넷(www.ugyo.net)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people.aks.ac.kr)
집필자
김자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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