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법자 황벽 희운은 당나라의 승려로서 시호(諡號)는 단제선사(斷際禪師)이다. 백장(百丈) 회해(懷海)의 문하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뒤 황벽산(黃檗山)에서 법을 전하여 이름을 떨쳤다.
황벽 희운의 설법을 편집하고 서문을 쓴 배휴(裵休)는 문장과 글씨에 능한 고위 관리이며, 수행 이력도 많아서 ‘황벽형의(黃檗形儀)’라는 화두(話頭)의 주인공인 인물이다. 규봉(圭峰) 종밀(宗密)의 『원각경약소초(圓覺經略疏鈔)』,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등에도 서문을 썼다.
목판에 새겨 닥종이에 인쇄한 책으로 가로 15.7㎝, 세로 24.2㎝의 크기이다. 책등 쪽에 다섯 구멍을 뚫어 실로 제본한 선장본(線裝本)이다. 『전심법요(傳心法要)』와 『완릉록(宛陵錄)』을 합본하였는데 표지 제목은 “전심법요(傳心法要)”로 되어 있다.
본문의 한 면은 16자 9행이며 행마다 계선(界線)이 있다. 열람자가 책을 읽으며 써넣은 것으로 보이는 7언(七言) 게송(偈頌)이 본문의 외곽선 위에 군데군데 적혀 있다.
대중(大中) 11년[857년] 배휴가 쓴 서문에 의하면, 자신이 회창(會昌) 2년[842년] 장쑤성[江西省] 종릉(鍾陵: 지금의 난창[南昌] 부근)의 수령으로 부임하였을 때 황벽 선사를 가까운 용흥사(龍興寺)로 초빙하여 아침저녁으로 도(道)를 물었고, 대중 2년[848년] 안후이성[安徽省] 완릉(宛陵: 지금의 쉬안청[宣城] 부근)의 수령일 때도 개원사(開元寺)에 모셔서 법을 전해 받았다고 한다. 물러나와 기억나는 대로 기록해 두었다가 선사가 입적한 뒤, 제자들에게 자신의 기록이 선사의 법문(法門)과 부합하는지 확인하고 편찬한다고 하였다.
이 책을 고려에서 인쇄하게 된 경위는 목은 이색이 임자년[1372년]에 쓴 발문에 상세하다. 그에 따르면 중암 수윤이라는 일본인 승려가 구법(求法)을 위해 중국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고려에 머물고 있었다. 소지하였던 『전심법요』와 『완릉록』을 널리 전하기 위해 직접 새겨서 목은에게 발문을 부탁하였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나서야 이를 인쇄하기에 이른 것이라 한다.
발문 뒤에 시주자로 이름이 기록된 김광을(金光乙), 염흥방(廉興邦), 윤환(尹桓)은 모두 당대의 고위 관리들인데, 염흥방은 일본인 승려 중암에게 거처를 제공한 이라고 목은은 밝히고 있다.
첫 장을 열면 “황벽산단제선사전심법요(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라는 제목 아래 배휴의 서문이 나오고 바로 본문으로 이어진다. 내용은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오직 한 마음일 뿐 다른 법은 없다.”는 단제선사가 자신에게 들려준 법문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행해진 자신과 선사 사이의 문답과 설법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선사가 강당에 올라 대중을 상대로 행했을 상당법어(上堂法語)도 실려 있다.
이어서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이라는 제목으로 배상공(裴相公)과 선사 사이의 15차례 문답과 한 차례의 상당법어가 담겨 있다. 이 글은 배휴가 직접 기록한 것은 아니다. 가장 뒤에는 이색이 쓴 발문과 시주자 명단이 인쇄되어 있다. 중국과 한국 선종(禪宗)의 주류인 임제종(臨濟宗)의 선풍(禪風)을 보여주는 지침으로서 선가(禪家)에서 소중히 여기는 책이다.
고려 말기에 간행된 불전(佛典)의 좋은 사례로서 인쇄술과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충청북도 청주시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가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3월 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